“이미 지난해 여름부터 전쟁은 결정됐다.”
러시아군 포로의 입에서 나온 이 말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을 반년 넘게 준비했다는 걸 의미한다. 미국 정보 당국이 유럽 동맹국들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가능성을 처음 경고한 게 지난 11월이다. 당시 러시아는 자국 영토 내에서 이뤄지는 내부 군사 활동이라고 공격적인 의도가 전혀 없다고 밝혔지만 거짓으로 드러난 셈이다.
러시아군 포로가 폭로한 우크라이나 전쟁은 ‘푸틴의 전쟁’이었다. 이들은 왜 자신들이 우크라이나 땅에 있는지, 그곳에서 뭘 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개전 후 한 달 가까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주요 도시에 대해 공격을 퍼붓고 있지만 포로들은 “이 전쟁의 목적을 모르겠다”며 “그저 정부 이익을 위해 새끼 고양이처럼 여기에 던져졌다”고 토로했다.
우크라이나 침공 군사 훈련이라 속였다
러시아군 드미트리 코발렌스키 중위는 부대가 이동하기 전날 저녁(지난달 23일) 자신의 부대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달 초 포로가 된 그는 현지 매체와의 기자회견에서 “러시아 수뇌부는 군사 훈련이라며 육군 장교들도 속이고 침공을 준비했다”며 “병장 이하 병사들은 국경을 넘어갈 때까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몰랐다”고 전했다.
그는 2021년 여름에 모든 부대가 훈련을 받기 위해 동원됐는데 이 훈련이 전쟁 준비였고, 사실상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지난해 여름에 전쟁을 결정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러시아 특수신속대응반(SOBR) 소속 경찰인 드미트리 미하일로비치는 지난 2월 훈련에 동원됐다. 그가 당시 들었던 말은 벨라루스에서 합동 훈련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지난달 24일 ‘러시아군과 함께 우크라이나 영토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나서야 자신이 훈련에 동원된 게 아니라 전쟁에 동원됐음을 알게 됐다.
미하일로비치와 함께 포로가 된 러시아 특수경찰(OMON) 소속 대원은 “침공 날에서야 지시를 받았는데 러시아 군대와 함께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로 가라는 말만 들었다”며 “지시에 대한 상세 설명도 없이 차에 탑승하라고 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외국 영토에선 어떤 지시도 수행할 수 없는 경찰이 왜 우크라이나로 가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나치로부터 해방시킨다고 속였다
익명을 요청한 러시아군 한 지휘관은 포로가 된 뒤 우크라이나군에 “우리는 우크라이나를 나치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평화유지군으로 투입되는 것이란 얘길 들었다”고 진술했다. 그는 미디어를 통해 우크라이나가 파시스트 정권에 지배 당했다는 얘기를 계속해서 들었다고 전했다.
미하일로비치도 같은 얘기를 했다. 그는 “TV에서 민족주의자, 나치 세력이 권력을 잡았고 우크라이나 시민들은 여기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고 했다”고 설명했다. 미디어를 이용한 러시아의 거짓 선동과 세뇌가 오래전부터 있어 왔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부자지간으로 알려진 2명의 포로도 우크라이나 매체 UATV에 “‘나치와 파시스트 세력이 우크라이나 시민을 죽이고 있다’는 말을 들은 뒤 우크라이나 마리우폴로 오게 됐다”고 말했다.
민간인을 쏴 죽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항복했다는 이들은 “우크라이나인은 러시아가 주장한 것처럼 파시스트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영토를 지키고 있는 것뿐”이라며 “러시아에서 우리가 보고 들은 것과 이곳 상황은 대비된다. 러시아 정부를 믿지 말라”고 강조했다.
다른 포로도 “러시아 TV에서 말하는 것과 정말 다르다. 여긴 나치가 없다”며 “러시아 사람들이 TV를 끄고 푸틴 대통령 말을 듣지 말기 바란다”고 전했다.
푸틴은 러시아 국민도 속였다
러시아는 한국과 같은 징병제 국가다. 18세부터 27세까지의 러시아 남성들은 법적으로 1년간 병역의 의무를 치러야 한다. 이들은 러시아 대통령령에 따라 러시아 국경 밖에서 활동할 수 없다.
지난 5일 푸틴 대통령은 이번 ‘특별 군사작전’에 동원된 징집병은 한 명도 없다고 단언했다. 지난 7일엔 징집병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고,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생포된 러시아군 중 다수는 자신을 징집병이라고 했다. 그제야 러시아는 일부 징집병의 참전 사실을 인정했다. 다만 크렘린궁은 이를 일부 군대의 일탈 행위로 몰고 갔다.
아들이 군 복무 중 일 것이라 믿은 이들의 부모들은 러시아 소셜 미디어에 자식의 행방을 묻는 글을 잇달아 올리며 러시아 정부에 제대로 된 답변을 요구하고 있다. 한 병사의 어머니와 친척들이 시베리아 한 도시 시장에게 젊고 준비 안 된 병사들이 총알받이로 전장에 끌려갔다며 거세게 항의하는 장면이 담긴 동영상도 돌고 있다.
이 밖에도 러시아군 포로는 자신들의 공격이 우크라이나 민간인을 향한 것임을 폭로하기도 했다. 러시아군 소속 폭격기 조종사 콜로넬 막심 크리슈토프 중위는 “명령에 따라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폭격 목표가 군사시설이 아니라 주거용 건물 등에 살고 있는 평화로운 시민들이란 점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크리슈토프 중위는 러시아군이 민간인 거주 지역에 유도기능이 없는 ‘멍텅구리 폭탄(dumb bomb)’인 ‘FAB-500’을 투하했다고도 했다. 그는 “내가 저지른 범죄의 심각성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빨리 전쟁이 끝나고, 우크라이나 시민들에 대한 학살 책임이 있는 사람들에게 법의 심판을 받도록 해야 한다. 우린 이미 이 전쟁에서 패했다”고 말했다.
미 정보당국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군이 3주도 안 돼 7000명 이상의 전사자를 낸 것으로 추산했다.
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