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가족과 함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 핀란드 수도 헬싱키에 도착한 러시아인 비야체슬라프(59)는 워싱턴포스트(WP)에 “(러시아에) 남는 것은 무의미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러시아를 떠나는 러시아인이 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내부적으로 정치적 탄압 강도를 높인 데 이어 대외적으로 우크라이나 침공을 감행하면서 러시아의 장래가 어둡다고 판단한 것이다.
AP통신은 14일(현지시간) 미국과 멕시코 사이 국경에서 미국 망명을 신청하는 러시아인이 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에 따르면 지난해 8월부터 올해 1월까지 미·멕시코 국경에서 미국 망명을 신청한 러시아인은 8600여명이었다. 1년 전 249명의 무려 35배에 달한다.
지난해부터 러시아인의 미국행이 급증한 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반대파 탄압이 거세진 탓으로 분석된다. 망명 신청자들을 돕는 율리야 파슈코바 변호사는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푸틴 대통령의 정적인 알렉세이 나발니의 수감 이후 러시아인의 미국행이 늘었다”며 “푸틴 반대파, 동성애자, 무슬림, 기업인 등이 망명을 신청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 탈출 행렬은 더욱 불어나고 있다. 주요 목적지는 러시아에서 출발하는 항공편이 유지되고 있고 러시아인이 비자 없이 출국할 수 있는 터키,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랍에미리트(UAE) 등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난 2월 24일 이후 조지아에는 2만5000여명의 러시아인이 입국했고 아르메니아에는 8만명이 들어왔다. 러시아에서 육로로 국경을 넘을 수 있는 핀란드의 지난달 러시아 입국자는 4만4000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3% 증가했다. WP는 매일 500여명의 러시아인이 핀란드 주요 기차역에 도착하고 있다고 전했다. 러시아 출신 정치경제학자 콘스타틴 소닌 미 시카고대 공공정책대학원 교수는 침공 이후 열흘간 고국을 등진 러시아인이 2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전쟁 발발 이후엔 탈출 동기도 다양해졌다. 이전까지는 푸틴 정부의 권위주의 정책에 대한 반발 등 정치적 이유가 컸지만 러시아 국경 폐쇄, 징집에 대한 두려움, 서방 제재 여파 우려 등 사회·경제적 목적의 이주도 늘었다.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분노 등도 원인이 됐다. 정치학도인 예브게니 랴민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인을 도울 수 있는 무엇이든 하는 게 내 책임이라고 느꼈다”며 “푸틴 정권에 대항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러시아를 떠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의 탄압이 노골화되고 전쟁이 길어질수록 러시아인의 탈출 러시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임송수 기자 songst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