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4만표 얻은 대선 성적표는 민주당의 소중한 정치적 자산
그러나 정치공학적 접근으로 유권자의 표심 읽을 수 있을까
욕 먹더라도 더 치열하게 싸워 패배의 원인 찾고 책임 물어야
그러나 정치공학적 접근으로 유권자의 표심 읽을 수 있을까
욕 먹더라도 더 치열하게 싸워 패배의 원인 찾고 책임 물어야
1614만7738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성적표다. 민주당 계열 역대 대통령 후보 중 단연 톱이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은 탄핵 정국에서 1342만3800표를 얻었다. 이 후보는 이보다 272만표 더 받았다. 2002년 노무현 전 대통령보다 413만표, 1997년 김대중 전 대통령보다 582만표 많다. 지금까지 최다 득표 기록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갖고 있었다. 2012년 1577만3128표를 얻어 당선됐다. 이 후보는 ‘선거의 여왕’보다 37만표를 더 얻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에게 아쉽게 졌지만 민주당으로서는 엄청난 정치적 자산이다. 투표율이 높았다고 반박할 수도 없다. 득표율로 비교해도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정권은 내줬지만 이 자산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민주당의 고민은 여기에 있는 듯하다. 이례적으로 선거에서 패한 지 5일 만에 결산을 마치고 비상대책위원회라는 새로운 체제에 시동을 걸었다. 당 대표와 최고위원 전원이 백의종군을 선언하고 원내대표가 비대위원장을 맡는다, 후임 원내대표는 당내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교황 선출 방식으로 뽑는다고 발표했다. 선거에서 패한 정당에 가장 힘든 숙제인 책임론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울며 마속의 목을 벤 제갈공명이 사마의의 추격을 따돌리고 촉으로 무사히 돌아가는 장면이 떠오른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라고 했던 이순신 장군의 비장함도 생각난다. 그러고는 70여일 남은 6·1 지방선거를 향해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큰 전투에서 안타깝게 패했지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말겠다는 태세다.
심지어 어떻게 싸워 역전의 발판을 마련할 것인지 구체적인 방법까지 나왔다. 대선에서 확보한 새로운 자산인 20대 여성을 주요 타깃으로 정한 것이 공격형 전략이라면 3월 임시국회에서 대장동 특검법을 통과시키겠다고 나선 것은 앞으로의 손실을 차단하는 수비형 전략이다. 전투는 유리한 장소인 국회에서 벌어진다. 이슈도 적당하다. 여성가족부는 이미 뜨거운 감자다. 잘 몰고 가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계륵을 만들 수 있다. 특검은 여야 대치만으로 충분하다. 선거에서 패했으니 특검법을 포함해 주춤했던 법안을 밀어붙여도 정치적 부담은 훨씬 줄어든다. 이렇게 해서 지방선거에서 성공한다면 민주당은 정권을 내준 충격을 3개월도 안 돼 극복할 수 있다. 정당의 목표는 정치권력 획득이다. 대권은 내줬지만 입법 권력은 흔들리지 않으니 아직 1대 1이다. 지방권력을 지키면 2대 1이 된다. 대권이 훨씬 크지만 버틸 수는 있다. 정권교체를 요구했던 유권자를 다시 껴안을 명분만 확보한다면 2024년 총선은 물론이고 2027년 대선에서 승산이 있다.
그럴 듯하다. 하지만 빠진 게 있다. 이 수습안에서 유권자는 또 배제됐다. 이번에도 국민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변수가 되지 못했다. 이번 대선에서 유권자들은 남의 잘못에 혹독하고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했던 위선, 권력을 앞세워 흰 것을 검다고 우겼던 오만에 반대표를 던졌다. 그 생각은 민주당이 대선에서 졌다고 다음날 아침에 사라지지 않는다. 며칠 전 민주당 비대위는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면서 첫 회의를 시작했다. 윤호중 비대위원장은 “교만함이 패배를 불렀다. 고치고 바꾸고 비판 받을 모든 화살을 쏘아주시길 바란다”고 했다. 다른 위원들은 정치개혁과 개혁적 입법을 약속했다. 하지만 질문을 조금만 바꾸면 다시 막다른 길이다.
민주당의 누가 어떻게 교만했는가. 그동안 당 안팎의 수많은 비판을 왜 무시했는가. 청와대와 국회, 광역단체장 17곳 중 14곳을 장악한 동안 정치개혁과 개혁 입법을 추진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윤 위원장을 포함해 민주당 누구도 이 질문에 답하지 않고 있다. 대신 정치공학적으로 접근한 계획표를 꺼내 놓고 다음 선거를 향해 무조건 달리면서 “우리는 달라졌다. 믿어 달라”라고 외치고 있다. 역대 어느 정당이 대선에서 패한 뒤 이렇게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는지 싶다. 민주당은 선거 결과를 오해하고 있다. 유권자가 더는 믿을 수 없다고 표로 보여줬는데도 소용없다. ‘그때 그 사람’이 ‘예상 가능한 그 사람’에게 공천을 주고, 늘 그랬던 방식대로 편을 갈라 여론을 몰고 갈 것이 뻔하다. 지금 민주당에 필요한 것은 처절한 싸움이다. 치열하게 논쟁하며 답을 찾아야 한다. 선거에 지더니 집안에서 자기들끼리 싸운다고 욕 좀 먹으면 어떤가.
고승욱 논설위원 swk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