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목사님이 성경 공부 시간에 한 교인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예수님은 왜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을 제자로 삼으셨을까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목사님은 적절한 답을 하지 못했고 그때부터 고민에 빠졌다. 어느 날 그가 이 문제를 놓고 묵상하던 중 갑자기 “왜 주님은 나 같은 인간을 당신의 종으로 선택하셨단 말인가”라는 예상 밖의 질문이 마음을 때렸다.
그는 자신을 향한 이 충격적이고 도전적인 질문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흐르는 눈물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종으로 선택받았으나 최선을 다하지 못한 후회가 한꺼번에 밀려오면서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가룟 유다가 바로 자신의 모습같이 느껴지며 부끄러워졌다. 주님의 선택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부르심에 대한 선택받은 자의 삶에 허물이 있고 죄가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목사님은 그날 이후 변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자기로부터의 개혁을 시작한 것이다. 그가 변하자 그의 주위 사람들이 변화되고, 그가 사역하는 교회가 순수한 주님의 공동체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아주 오래전 아는 목사에게 들은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성직자가 아닌 어떤 사람이 모 신학교에서 윤리에 대해 강의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복도에 학생 한 명이 무엇이 급했는지 소리를 지르면서 지나갔다. 그 교수는 강의를 중단하고 대단히 화가 난 얼굴과 음성으로 “어떤 XX가 이렇게 떠들어!” 하면서 교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리고 달아나는 학생을 쫓아가면서 “야! 이 XX야 너 이리 와!” 하고 고함을 치면서 욕을 해댔다.
당시 학생으로 그 강의를 듣고 있었던 이 목사는 평소 그 교수에 대한 존경심에 상처를 입고 실망했다. 이런 태도는 그 교수의 인격과 생활의 단면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저런 교수의 윤리 강의는 더는 들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교실을 나와 버렸고 그 강의에 대한 수강 자체를 포기하게 됐다.
그 교수는 점점 더 유명해져 한국 기독교 윤리를 논하는 저명인사가 됐다. 그리고 교회와 목회자의 윤리를 비판하는 단체와 무리의 대부처럼 되어 버렸다. 그러나 당시 그 교수에게 실망을 느낀 이 목사는 일평생 사회의 소외 계층을 위한 소박한 목회자로서, 한 윤리 교수의 위선적 행동을 씁쓸한 마음으로 지켜보며 살았다.
그 교수는 교회와 목회자의 비윤리성을 고발하는 데 앞장서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며 살다가 늙어갔다. 그러나 남의 윤리에 대하여는 목청을 돋우면서도 자신의 행동이나 삶에 대해서는 드러나는 반성이나 회개가 없었다. 아마도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를 수도 있겠고, 알면서도 자기 정당화 속에서 변명으로 일관하면서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에는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의 후예로 자처하며 교회를 개혁하겠노라고 나선 사람이 너무도 많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교회는 개혁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에 의해 개혁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가룟 유다를 다른 사람으로 지목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개혁의 답을 찾을 수 없다.
‘나’를 개혁 대상에 포함하고 높아진 목소리를 조금 낮추고, 붉어진 얼굴에 사랑의 표정을 되찾고, 부르심의 은총에 주체할 수 없이 감격하는 한 개혁자의 목소리를 통해 굳어진 한국교회가 녹게 되고 개혁의 실마리가 풀리는 날을 기대해 본다. 비판에 사랑의 옷을 입히고 은총에 감격하여 “주여, 나 같은 인간을 택하셨습니까”라고 울먹이는 자기로부터의 개혁이 교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
문성모 (강남제일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