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에 보면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의 모습은 오늘 복음을 필요로 하고 있는 모든 인류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 사람은 스스로 설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은 누군가를 그리고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또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일어나 걷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이 사람은 일어나 걷는 것은 생각도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생각은 포기한 지 이미 오래됐습니다. 이 사람은 ‘내 삶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을 수 있을까?’ 하며 살았습니다. 이것은 기적을 아니, 변화를 포기한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변화와 기적을 포기한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합니까? 그저 성전 문 앞에 앉아 있으면서 성전에 가서 예배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기도하러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얼마의 돈을 기대하며 구걸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에게 삶의 의미 같은 것은 배부른 사람들의 사치스런 생각이요, 오늘 하루 이 땅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얼마의 돈이었지 믿음이나 소망 그리고 사랑 같은 것에 그는 아무런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이것은 먹고 사는 것에만 관심을 쏟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예수님은 사람 사는 것이 돈에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사람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비극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깨우치는 것이 현대교회의 선지자적 사명입니다. 사람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교회가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의 교회가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어야 합니까? 초대교회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줄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이웃을 도울 수 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성전에 기도하러 가던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와 요한이 돈 몇 푼을 바라고 손을 벌리고 있는 앉은뱅이를 보며 한 말이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였습니다. 없는 것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있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내게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재산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우리가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고, 영생을 얻었고,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참 소망을 가지고 긍정적인 삶의 자세를 가지고 이 험한 세상을 살게 되었다면 이 이상 놀라운 재산이 어디 있겠습니까? 걸을 수 없던 사람이 걷게 된 것은 그의 생애에서 최대의 경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것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아는 사람만이 그리스도 없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이 세상 사람들에게 주어야 할 것은 몇 푼의 돈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변화시키신 이 사랑의 주님, 구원의 주님, 능력의 주님을 그들에게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이 이 구걸하는 사람에게 한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보라” 했습니다. 절망 속에서 죽지 못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걷지 못하는 이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의 눈동자에서 무엇을 보았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걷지 못하는 사람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이 사람은 베드로의 손을 잡는 순간 그리스도의 자비와 사랑의 손길, 능력을 느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 놀라운 기적이 어디서 일어났습니까? 성전 미문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런 기적과 변화가 오늘의 교회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교회의 문은 ‘미문’이 아니라 ‘위선의 문’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변화 받는 사람들이 이 사랑을 증거하고 이 사랑을 나눠주고 이 능력을 나눠 주기 위해서 나아가는 아름다운 교회의 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죄인들이 변화 받아 새사람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저 아름다운 교회의 문이 되었으면 합니다. 13세기의 스콜라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교황과 대화하는 기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교황은 세계 각국의 가톨릭 교회에서 오는 금은보화를 보면서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보세요! 초대 교황이셨던 베드로 사도는 ‘은과 금을 내게 없거니와…’ 이렇게 가난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금은보화를 많이 가지게 되었고 이 웅장한 건물을 보십시오” 하면서 자랑했습니다. 교황의 자랑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교황님, 초대교회에는 은과 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해서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워 걷고 뛰게 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물론 오늘의 교회는 아름답고 엄청난 크기의 성당, 금으로 둘러싼 기둥, 번쩍거리는 대리석 바닥, 그 넓은 땅을 가지고 있고 수많은 신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정말 은과 금이 이렇게 많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가 가졌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 말에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는 어떻습니까? 세계교회가 주목하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어떻습니까? 세상 사람들에게 많은 비난과 조롱을 받고 있는 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그 중에 상당 부분이 교회가 책임져야 할 것들입니다. 세상은 교회를 싫어하면서도 교회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대에 어긋나기 때문에 실망하고, 배신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서는 아무 것도 기대할 수가 없는데 그래도 교회만은 무엇을 줄 수 있지 않겠나 하는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교회가 줄 것이 무엇입니까? 돈 몇 푼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은과 금은 없어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적으로 걷지 못하는 불쌍한 영혼들을 일으켜 세우는 교회가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는 교회의 재정, 많은 교인 수, 크고 호화로운 예배당, 교회가 벌려 놓은 많은 사업을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평생을 걷지 못하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비굴한 표정으로 손 벌리고 구걸해 하루하루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능력 있는 교회입니다.
이 능력을 잃으면 맛 잃은 소금처럼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 능력을 점점 잃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보이는 교회가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 있기 때문에 교회라는 배에 세상 물이 알게 모르게 스며듭니다. 이 스며드는 물을 퍼내지 않으면 교회라는 배는 세상에 빠져서 배 구실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과거 중세교회가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500여 년 전 일어난 종교개혁으로 교회가 새로워졌습니까? 폴 틸리히의 말대로 “종교 개혁은 계속되어야 만합니다”
교회에 스며드는 세상이란 물을 계속 퍼내야 합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너무 편안한 환경에서 잠자는 파수꾼이 된 것 같습니다. 도둑이 와도 짖지 못하는 개가 되지는 않았습니까? 야고보의 말대로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돈 앞에 비굴한 교회, 권력 앞에 굴복하는 교회, 능력을 상실한 교회, 경전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부인하는 교회, 잠자고 꿈꾸는 교회, 이것이 한국교회의 현주소는 아닌가요. 저는 이것이 저의 잘못된 생각이 되기를 바랍니다. 초대 일곱 교회처럼 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저의 간절한 기도 제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역사하는, 능력 있는 한국교회가 되어 영적으로 걷지 못하는 이 민족을 일으켜 세우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국제독립교회
연합회 설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