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머니 황경애 집사님은 모든 어머니들과 마찬가지로 자식들을 위해서 일생을 바치신 분이셨다. 나의 고향은 김포공항 옆에 있는 대장동이다. 김포평야를 끼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에서 자랐다. 나는 교회가 없는 동네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고등학교 2학년까지는 예수님을 모르고 살았다.
당시 한 2km 정도 떨어진 이웃마을에 오곡감리교회가 있었으나 정작 큰 마을인 대장동은 교회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고등학교 3학년 때, 어머니가 갑자기 교회를 나가겠다고 선언을 하셨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를 따라 오곡교회에 가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교회 다니시기 전에 어머니는 시집살이로 고달픈 인생을 사셨다. 위로 시부모를 모시고, 결혼하여 자녀가 두 명이나 되는 시동생 식구가 건너 방에서 같이 살고, 아직 장가를 안간 막내 시동생을 데리고 사셨다. 거기다가 당신이 낳은 자식이 6남매였다. 그야말로 혼자 대가족을 뒷바라지 하며 사셔야만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낮에는 논밭에 나가 사시다시피 하며 일하셨다. 당시 농촌에서 자녀를 학교에 보낼 수 있는 것은 초등학교 정도였다. 그러나 나의 부모님은 자식들을 고등학교까지는 가르쳐야 하겠다고 결심하셨다. 그러다보니 남들이 다 가는 꽃구경 한번 안 가시고 억척스럽게 일만 하셨다. 그러나 자식들을 공부 시키느라 빚만 늘었다.
어느 날 극심한 시집살이로 고생하는 어머니가 아버지와 부부싸움을 하시고 집을 나가셨다. 집에 어머니가 안 계시니까 나는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다. 밥도 먹지를 않았다. 학교에 가서도 온 종일 어머니 생각만 했다. 학교에서 돌아와 집 안에 들어 올 때 “엄마”하고 부르면 어머니가 안 계셨다. 나는 마루에 걸터앉아서 집 나간 어머니 생각만 했다. 작은 어머니가 나에게 와서 “너의 엄마가 장터고개 할아버지 댁에 계시니, 네가 가서 오시라면 오실 거야”하고 내 귀에다 속삭여 알려 주었다.
다음 날 나는 학교를 가다가 양 갈래 길에서 한참을 서서 고민을 했다. 왼쪽 길로 가면 장터고개 증조할아버지 집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학교로 가는 길이었다. 나는 학교로 가는 길을 버리고, 장터고개 할아버지 댁으로 가는 길을 택하였다.
증조할아버지 댁에 가니, 할머니가 “네 어미는 저녁이나 돼야 오니, 너는 학교를 갔다가 이리로 와라”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가 혹시 낮에 오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냥 할아버지 댁 마루에 걸터앉아 하루 종일 어머니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저녁이 되니까 어머니가 큰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들어오셨다. 어머니는 가정에서 쓰는 잡화 물건을 보따리에 담아서 그것들을 머리에 이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방물장사를 하셨다. 어머니는 물건을 팔고 받은 곡식을 잔뜩 머리에 이고 힘겹게 들어오셨다. 나는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움켜잡고 “엄마! 집에 가요. 나는 엄마 없이 못 살아요. 나 엄마가 없어서 이틀이나 밥을 먹지 않았어요” 하면서 막 울었다. 어머니는 난처한 표정을 짓고 안마당에 서 계시다가, 비장한 어조로, “그래! 자식들을 위해 나는 들어간다”하고 선언하셨다. 나는 그날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6km를 걸어서 집으로 오는데 마치 개선 장군 같았다. 그 일로 나는 초등학교 6년 동안 단 하루를 결석하게 되어 6년 정근상을 타야만 했으나 후회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집에 돌아오신 후 전보다 더 열심히 가사를 돌보셨다. 여전히 시집살이는 더 심해졌다. 그런 가정의 어려운 상황에서 어머니는 심한 스트레스와 힘든 노동으로 몸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지셨다. 내가 7살 때 어느 날 저녁, 어머니의 위경련이 발작을 했다. 어머니는 극심한 통증을 견디기가 힘들어 비명을 지르며 고통스러워하셨다. 마침 집에는 아무도 없고 어린 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나보고 오정동에 사는 의사를 모시고 오라고 하셨다. 오정동은 우리 동네에서 약 3km 정도 떨어진 이웃마을인데, 당시 그 동네에는 무면허 의사 한분이 살고 있어서, 어머니가 아프실 때마다 와서 임시 치료를 해 주곤 하셨다.
오정동을 가려면 김포평야를 가로질러 가야만 했다. 마침 그날 밤 보름달이 환하게 비춰서 길은 낮처럼 훤했다. 나는 어머니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무섭지만 단숨에 의사 댁을 찾아갔다. 대문을 막 두드려 주무시는 의사를 깨워 집으로 모시고 와서 진통제를 놓아줘서 어머니는 그날 밤 고비를 넘기시기도 했다.
어머니가 교회를 나가기로 결심한 이유는 육신의 병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병을 고치기 위해서 굿도 하시고, 푸닥거리도 하셨다. 장독대에 냉수를 떠 놓으시고 천지신명에게 빌기도 하셨다. 나중에는 서울에 있는 큰 병원을 찾아다니며 치료를 했으나 어머니의 병은 낫지를 않았다. 결국 어머니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병을 고쳐보고 싶으셨던 것 같았다. 어머니는 매일 새벽에 교회에 나가 기도하셨다. 기도 제목은 당신의 병 고침과 자식들 잘 되게 해 달라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우리는 6남매였고, 나는 둘째 아들이었다. 당시에 어머니가 기도한 내용이 너무 허황되다고 생각을 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그 어머니의 기도가 다 이루어졌다.
어머니는 예수님을 믿고 아버지에게도 간곡하게 교회에 나가자고 말씀을 하셨다. 이웃 사람들에게도 열심히 전도를 하셨다. 어머니의 전도로 우리 동네에도 차차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친척들의 박해가 심하였다. 우리 집은 장손이라 제사가 자주 돌아왔다. 그 때마다 방 안에서는 집안 어른들이 나에게 교회를 나가지 말라고 했고, 부엌에서는 친척 여인들이 어머니를 핍박했다. 그러나 나와 어머니는 그런 상황에서도 굽히지 않고, 그들의 핍박을 잘 이겨냈다. 그 후에 우리 형제들도 모두 교회를 나갔고 아버지도 미국에 사는 딸의 전도를 받아 LA 월셔감리교회에서 세례를 받으셨다. 나중에는 친척들 중에도 많은 가정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어머니가 우리 집안의 믿음의 조상이 된 셈이다.
내가 신학대학 3학년 때 고향 마을에다 대장교회를 세웠을 때, 어머니는 기도로 나를 도우셨다. 어머니가 나를 위한 기도제목은 내가 참된 목사가 되는 것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기도를 힘입어 어디로 가나 목사로서 최선을 다 하려고 힘썼다. 내가 전도사였을 때, 어머니의 회갑을 맞이했다. 당시 나는 경제적으로 너무나 어려웠다. 월 5만원의 사례를 받을 때였다. 거기다가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하루 어렵게 살고 있을 때였다. 나는 어머니 회갑에 가기는 가야 하겠는데, 돈이 한 푼도 없었다. 그날 새벽에 나는 주님께 어머니 회갑에 빈손으로 갈 수 없으니 도와 달라고 기도를 했다. 아침에 생각지도 않게 남자 권사님 한 분이 자전거에 통닭 한 마리를 싣고 오셨다. 나는 그것을 가지고 어머니 댁으로 갔다. 다른 형제들은 여러 가지 좋은 선물과 축하금을 어머니께 드렸으나, 나는 겨우 통닭 한 마리를 드릴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동네 사람들에게 두 팔로 크게 원을 그리며 “글쎄 말이유! 우리 전도사 아들이 이렇게 큰 통닭을 가지고 왔지 뭐유”하고 자랑을 하셨다.
어머니는 병환으로 고생하실 때, 내가 목회하는 약수 형제교회로 오셔서 “나는 아들 목사님의 기도를 받으며 남은 생애를 살고 싶다”고 하셨다. 그러다가 병이 악화되어 당시 동대문에 있는 이대 부속병원에 입원을 하셨다. 어머니는 나에게 “나는 죽어서 천국 갈 준비가 다 되어 있다”고 하시면서 “고향집에 가서 죽고 싶으니 나를 퇴원시켜 달라”고 애원을 하셨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를 고향집으로 모셨다. 고향집에 오니까 어머니는 대장교회 목사님을 모셔다가 예배를 드려 달라고 하셨다. 목사님이 오시니까, 어머니는 자신을 일으켜 달라고 하시고는 사방을 둘러보시고 그대로 앉아서 예배를 드리셨다. 어머니는 예배를 다 마치고 목사님이 어머니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도를 끝내자 스르르 숨이 멎어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죽으면 나보고 입관해 달라고 유언을 하셔서, 내가 옷을 입혀 드리려고 보니 마치 주무시고 있는 것 같았다. 얼굴이 너무나 평안한 모습이었다. 어머니는 평생을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셨고 우리 집안에 믿음의 조상이 되셨다. 아! 그리운 나의 어머니!
임준택 목사(대림감리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