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당선인이 확정된 10일 오전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내 아들은 직접 투표를 하지 않았는데 누군가 아들 명의로 투표를 했다’는 내용의 글이 올라왔다. 아직 수사기관 등에서 사실관계가 확인되지 않았지만 ‘역대급 부정 선거’라는 내용의 댓글이 줄줄이 달리고 있다. 이 글 외에도 본인이나 지인의 경험이라며 의혹을 제기하는 짧은 글이 여러 개 올라왔다.
제20대 대통령 선거 기간 내내 온라인 공간에서 계속된 선거 관련 음모론이 대선이 끝난 뒤에도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여야가 여느 선거 때보다 거센 네거티브 공방전을 벌이면서 가열된 선거 열기가 여론을 쪼갠 영향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먼저 음모론 확산 배경에 사회적 신뢰 문제가 놓여 있다고 지적한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음모론이 이토록 심한 건 그만큼 사회적 신뢰가 충분하지 못하다는 방증”이라고 했다. 특히 이번 대선에선 선거관리위원회가 확진·격리자 사전투표 관리에 허점을 노출하면서 음모론 발호의 빌미를 제공한 측면이 있다. 최창렬 용인대 정치학과 교수는 “대다수 음모론은 근거가 없지만 선관위 관리 부실 문제가 (음모론을) 야기한 측면이 있기 때문에 마땅히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선거관리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서 투·개표 현장에서 소동도 빚어졌다. 대선 당일인 9일 저녁 인천 부평구 한 개표소에서는 보수 성향의 유튜브 채널 ‘가로세로연구소’ 관계자 등이 “신원 미상의 남녀가 투표함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 주장하면서 8시간 이상 투표함 이송을 막는 일도 벌어졌다. 선관위 측은 “개표를 방해하거나 투표함을 탈취하는 행위는 범죄행위이기 때문에 경찰에 수사를 요청했다”고 밝혔다. 국민혁명당 전광훈 목사가 출연해 “부정선거 양심 선언을 하면 10억원을 주겠다”는 내용의 영상을 투표 뒤에 퍼나르는 이들도 있었다.
페이스북에선 당선인 확정 이후에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시민들이 위조투표지 두 박스를 지키고 있어 지원이 필요하다’라는 게시글이 확산되기도 했다. 이밖에 ‘특정 후보 기표란이 코팅돼 있다’ ‘비닐장갑을 끼면 부정투표가 된다’는 식의 근거 없는 얘기가 퍼져 선관위가 가짜 뉴스라고 해명에 나서는 일도 있었다. 무효표(30만7542표)가 앞선 두 차례 대선보다 2배 이상 많이 나온 것을 음모론과 결부시키기도 한다. 사퇴 후보에 대한 안내나 표시가 없어 무효표를 유도했다는 주장이다.
서울의 한 대학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음모론은 혐오 정치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얼굴인데, 민주주의 국가에서 ‘꽃’으로 불리는 선거를 부정하는 사회적 흐름은 매우 치명적”이라며 “선거를 ‘전쟁’이 아닌 ‘축제’로 만들기 위한 정치권의 각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정치권부터 대화와 타협, 양보의 과정을 국민에게 보여주면서 정치의 순기능을 회복해야 한다”고 했다.
박민지 신용일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