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발레 왕국’ 위상 흔들린다

입력 2022-03-11 04:03
지난 2월부터 미국 투어를 하고 있는 러시안 발레 시어터(Russian Ballet Theater)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우리는 평화를 위해 춤춘다’는 반전 성명을 발표하고 투어 기간엔 단체명을 약자인 RBT로만 쓰기로 했다. 사진은 이 같은 사실을 현지 공연장 무대막을 통해 알리는 장면. RBT 페이스북

우크라이나 침공의 여파로 ‘발레 왕국’ 러시아의 발레단들이 국제무대에서 퇴출되고 있다. 마린스키 발레단과 볼쇼이 발레단 등 러시아를 대표하는 양대 발레단 외에 투어에 의존하는 민간 발레단도 예외는 아니다. 발레계에서 압도적이던 러시아의 위상이 흔들릴 것으로 예상된다.

영국에선 런던 로열오페라극장이 올여름 예정됐던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의 공연을 취소했다. 지난 1월부터 3월까지 영국 투어를 하던 러시아 시베리아 국립발레단도 지난달 28일 남은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귀국했다. 이곳 발레단은 영국 에이전트와 손을 잡고 ‘백조의 호수’ ‘로미오와 줄리엣’ 등 전막 발레 5개를 갖고 23개 도시를 돌고 있었지만, 여론 악화와 극장 측의 부담으로 남은 공연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에서도 마드리드의 테아트로 레알이 5월로 예정됐던 볼쇼이 발레단의 공연을, 카탈루냐의 카스텔 드 페랄라다 페스티벌이 오는 7월 마린스키 발레단의 공연을 취소했다. 프랑스 파리 국립 오페라극장 역시 러시아 당국과 관련된 예술가 및 예술단체와 협업을 중단한다는 성명을 지난 1일 발표했다. 이 극장에 소속된 파리오페라발레가 오랫동안 마린스키 발레단 및 볼쇼이 발레단과 교환·합동 공연 등 협업을 진행했지만, 재개를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아일랜드에서도 지난달 25일부터 열흘간 예정됐던 로열 모스크바 발레단의 투어가 바로 전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중단된 데 이어 오는 29일부터 일주일간 예정됐던 상트페테르부르크 발레 시어터의 투어 역시 취소됐다. 두 발레단의 경우 극장에 소속돼 공공 지원을 받는 국공립 발레단이 아니라 투어 공연을 주로 하는 민간 발레단이지만 악화한 여론을 피하지 못했다.

반면 투어 전문 민간 발레단인 러시안 발레 시어터는 지난달 9일부터 두 달간 미국의 50개 도시를 도는 투어를 진행 중이지만 일정이 취소되지 않았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우리는 전쟁에 반대한다. 우리는 평화를 위해 춤춘다. 우리는 우크라이나를 지지한다”는 메시지를 내는 한편 단원들이 12개국에서 왔으며 수석 발레리나 올가 키프야크가 우크라이나 출신임을 적극적으로 언론에 피력한 덕분이다. 지난 2일에는 밀워키 공연을 앞두고 현지에서 러시아 단체라는 이유로 비난이 나오자 이튿날 투어 기간 중 단체명을 약자인 RBT로만 쓰기로 결정했다. 러시아 단체임을 드러내지 않기로 한 것이다.

구 소련은 냉전 시대인 1956년부터 세계 각국에 마린스키 발레단과 볼쇼이 발레단을 문화 사절로 보내고 발레 교사들을 파견했다. 91년 소련 붕괴 이후엔 러시아 스타 댄서들과 발레 교사들이 세계 각국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며 러시아가 발레 교류의 핵심이 됐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사태는 러시아 발레계를 냉전 시대 이전으로 돌려놨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