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선진국이라는 착각

입력 2022-03-11 04:06

언제부터인가 선진국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정치권에서 그런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1인당 국민소득 3만5000달러, BTS ‘기생충’ ‘오징어 게임’과 같은 문화 콘텐츠, 세계 10위 경제 규모와 같은 것들이 근거다. 국제적인 기준으로도 선진국은 1인당 소득이 높고, 발달한 산업이 있고, 여러 인프라가 잘 갖춰진 국가를 말한다. 유엔개발계획(UNDP)이 매년 발표하는 인간개발지수(Human Development Index)를 보면 2020년 기준 대한민국은 22위로 선진국이다. 국제통화기금(IMF)도 대한민국을 포함해 39개국을 선진 경제국으로 분류한다.

돈만 많으면 괜찮은 걸까. 경제력이 아닌 생존이라는 측면에서 국가를 평가하려는 시각이 있다. 지정학 및 국제안보 전략가인 피터 자이한은 국가의 존립과 발전을 위해서는 4가지 자산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①방어에 효율적인 영토 ②안정적인 식량 공급 ③지속 가능한 인구 구조 ④에너지의 안정적인 공급이다. 이 네 가지를 갖추면 국가를 유지 발전시킬 수 있고, 갖추지 못했다면 불안하다는 것이다. 영국 러스킨대학 글로벌 지속가능성 연구소(GSI) 연구진은 지난해 환경 파괴와 팬데믹 같은 복합 위기 상황에서도 생존이 가능한 국가 순위를 발표한 적이 있다. 뉴질랜드, 아이슬란드, 아일랜드, 호주, 영국이 순위가 높았다. 연구진이 적용한 기준은 자체 식량 생산 능력, 전력 생산 능력, 물품 생산·제조·유지 능력, 난민 유입 저지 능력 등이었다.

이런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대한민국 상황은 심각하다. 기본적인 식량과 에너지부터 문제다. 우리나라 곡물 자급률(사료용 포함)은 2020년 20.2%에 불과하다. 사료용을 제외한 식량자급률은 45.8%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중 최저 수준이다. 자급률이 90% 넘는 쌀을 제외하면 식량자급률은 10%대로 떨어진다. 우리나라의 에너지 수입 의존도는 2018년 기준 94%에 달한다. 전형적인 에너지 다소비 국가다. 원유 의존도(국내총생산 대비 원유소비량)도 OECD 회원국 중 1위로 최악이다. 원유를 많이 수입해서 그 에너지로 여러 상품을 만들어 외국에 수출하는 게 우리나라 경제의 핵심 구조다. 돌발 상황이 생기면 먹을 게 부족해지고 수출품도 만들지 못하고 전기도 부족해진다는 의미다.

한국은 원유 수입량 절반 이상을 중동에서 들여온다. 중동에서 산 원유를 배에 싣고 호르무즈 해협과 말라카 해협을 지나 대만 남부의 바시 해협과 루손 해협을 거쳐 들여온다. 우리 경제의 생명선이다. 일본도 같은 경로를 이용한다. 미·중 갈등이 본격화되자 일본 정치인들은 대만 방어 얘기를 많이 했다. 아소 다로 전 총리는 지난해 “대만에 큰 문제가 생기면 국가 존망 위기 사태”라고 말했다. 일본의 원유 수입로와 무역로를 지키겠다는 의미다. 일본은 이 항로를 지키기 위해 사실상 항공모함 체제도 갖췄다. 미국은 이런 일본에 아무런 견제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중국을 견제하는 일을 맡기려고 한다. 우리나라는 원유와 같은 에너지를 비롯한 수출입 물동량의 90% 이상을 해상교통로에 의존한다. 우리는 이 생명선을 지킬 능력이 없다. 미국이 지켜준다. 미국이 공짜로 지켜주지 않겠다고 하거나 지키기 싫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는 교통로 안전을 일본에 의존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누리는 선진국의 풍요로움이 모래 위에 쌓아 올린 성에서 누리는 풍요로움일 수 있다. 설마 그럴 일이 벌어지겠느냐고 말할 때가 아니다. 이미 징조는 충분히 나타났다. 코로나19 여파로 인한 글로벌 공급망 차질,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한 유가 상승, 기후위기로 인한 작황 부진이 심각하다. 에너지 가격이 오르고 농산물 가격도 오른다. 돈이 있어도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을지 모른다. 몇 년 전 중국의 한한령에 우리 경제가 몸살을 앓았다. 요소수 부족으로 자동차 운행이 위태로웠다. 게다가 우리는 지금 전 세계에서 가장 빨리 인구가 줄어들고 가장 빨리 늙어가는 나라다. 북한이라는 핵 무장 세력을 머리 위에 이고 있다.

우리나라는 선진국이다. 그런데 불안한 선진국이다. 돈 좀 벌었으니 어깨 좀 펴고 살자고 자랑할 때가 아니다. 스스로를 비하하는 것도 문제지만, 과대 포장은 더 위험하다. 지금 서 있는 자리부터 냉정히 살펴야 한다. 이건 생존의 문제다.

남도영 논설위원 dy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