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이 끝났다. ‘비호감’ ‘최악’이란 딱지에다 막판 사전투표 논란과 초박빙 표차까지 그야말로 ‘역대급’이었다. 이제는 선거기간 내내 각 진영이 쏟아낸 극단적 레토릭을 걷어내고, 집합적 선택을 구하는 합의된 절차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차분히 결과를 대면할 시간이다. 당선인에 대한 기왕의 지지 여부를 떠나 새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소망과 기대를 모아야 할 때다. 물론 이제 와 공적으로 약속된 정책을 절충하자는 건 가능하지도 않고 옳지도 않지만, 새 대통령이 5년간 나랏일에 임할 자세에 대해 요청하는 건 시민 모두의 권리다.
기독교와 세상을 연결하는 지면인 만큼 종교의 이름으로 요구할 건 무얼까 생각해본다. 정치 영역에서 실현해야 할 종교의 가치를 ‘정치적 사랑’으로 호명했던 여러 신학자, 사회학자를 떠올린다. 개개인의 사적 이익 추구를 최고의 가치로 인정하는 이 시대에 사랑과 자비는 어느덧 종교만의 언어가 됐다. 이런 시대에도 종교는 신(神)의 초월성, 숭고함이 상징하는 이성 너머의 무한하고 조건 없는 사랑을 포기할 수 없다. 종교의 가르침은 이런 신의 속성을 닮아 세속 삶의 구석구석에서 이를 실천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를 고양하는 데로 수렴한다. 따라서 정치적 사랑이란 정치 영역에서 실현할 수 있는, 아니 실현해야 할 종교의 가치가 된다.
정치적 사랑은 ‘사랑의 정치’가 아니다. 정치인 개인에게 요구되는 온유와 친절의 태도가 아니란 말이다. 정치적 사랑은 오히려 이렇게 사랑을 개인, 가족, 성적(性的) 틀에 가둬놓는 인식에서 벗어날 것을 명한다. 사랑을 감정의 작동으로만 제한하려는 이해 역시 비판한다. 종교가 말하는 사랑이란 타자성을 전제로 한다. 조건이나 처지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무엇과도 대체 못 할 가치의 존재로 인정하고 환대하는 것이다. 나·우리와 타자 사이에 극복 불가능해 보이는 균열을 넘어서게 하는 힘과 의지가 바로 사랑이다.
정치적 사랑은 사랑과 정치의 충돌 가능성을 토대로 한다. ‘정치적’이라는 형용은 권력과 연결되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데, 권력은 타인의 의지에 반해 제 뜻을 관철하는 힘을 뜻하기에 필연적으로 자기중심적이다. 이런 권력의 고유 속성은 타자의 의지와 욕망, 구원에 대한 용납과 인정, 나아가 성취를 지향하는 사랑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정치적 사랑은 역으로 ‘사랑의 정치성’을 드러낸다. 사랑의 실천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사랑은 힘의 방향과 연관된다. 권력을 사용해 유한한 자원을 어디에 얼마나 배치하느냐가 달려 있다. 여기서 정치적 사랑은 정의와 만난다. 사회구조적 차원에서 풀어내야 할 사랑의 원리가 곧 정의인 것이다. 나, 내 집단, 내 국가의 이익까지 뛰어넘는 공공의 선과 유익을 추구케 하는 가치가 바로 정치적 사랑이다.
정치적 사랑의 최종 지향점은 평화다. 폭력과 증오, 살상, 전쟁을 반대하고 막아내는 정치여야 한다. 비록 최종 완성으로서의 평화는 이루지 못한다 해도 불완전하고 상대적인 평화를 끊임없이 좇는 것이다. 정치의 힘을 가지고 이 사회를 평화의 공동체에 더 가깝게 만드는 것이다. 동유럽의 현재가 보여주듯 갈수록 격해지는 패권 국가들의 경쟁과 급변하는 국제질서 가운데 평화를 궁극의 가치로 설정하고, 기후와 생태의 위기에서 생명과 평화를 구하는 정치여야 한다.
어쩌면 새 대통령에게 정치적 사랑을 기대하는 건 지난 몇 달간 우리를 극도의 피로감으로 내몰았던 심각한 대립과 증오를 생각할 때 너무 공허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럴수록 공공을 향해 대안적 가치를 제시함으로써 더 나은 세상을 상상케 하는 것이 이 시대 종교의 몫이라 믿기에 목소리에 힘을 더 실어본다.
박진규 서울여대 언론영상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