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년 전 가상의 장소서 오늘의 팬데믹을 읽다

입력 2022-03-10 20:07

“병균이 아르카즈에 ‘깊숙이 침투했다는 것을’, 암암리에 확산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집에 있는 병균은 분무기로도 제거하지 못하리라는 것이 눈에 보였다. 지금 필요한 것은 환자가 있는 집들을 비우고, 사람들이 저항하면 수백년 전에 그랬듯이 안에 사람들이 있는 상태로 문에 못질을 해 집을 무자비하게 폐쇄하는 것이었다.”

1901년 오스만 제국 민게르 섬에 파견된 저명한 화학자이자 약사 스타니슬라프 본코프스키는 페스트가 퍼지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는 정통 기독교인이자 오스만 제국 이즈미르에서 페스트의 유행을 6주 만에 종식시킨 방역전문가다. 하지만 방역을 시행해보기도 전에 의문의 사건으로 목숨을 잃는다. 뒤이어 이슬람교도 의사 누리가 파견되지만 행정부는 무능하고, 사람들은 제재 조치를 따르지 않는다. 통치자는 서구 열강의 압력에 못 이겨 민게르 섬을 봉쇄한다.

소설 ‘페스트의 밤’에는 방역을 강경하게 진행하려는 정부, 방역을 거부하고 전염병을 믿지 않는 대중, 이슬람교와 기독교,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등이 질병에 대응하는 각각의 양상이 세밀하게 묘사돼 있다. 소설의 배경은 120년 전 가상의 장소지만 파묵의 날카로운 시선은 팬데믹 시대 독자들의 등을 서늘하게 한다.

오르한 파묵은 30여년간 전염병을 소재로 한 소설을 고민하다가 최근 5년간 이 책을 집필했다. 원고가 완성될 무렵 전 세계에 코로나19가 퍼지기 시작했다. 집필 중이던 소설의 내용과 실제 상황이 맞아떨어지면서 그는 작품을 수정하고 완성도를 높였다.

옮긴이 이난아는 서문을 통해 “파묵은 이 작품에서 음울할 수 있는 전염병 시대의 분위기를 흥미진진한 서사와 독특한 창작기법으로 섬세하게 묘사하며 ‘바늘로 우물 파기’라는 파묵 특유의 작가정신을 독자들에게 각인시킨다”고 소개했다.

1952년 터키 이스탄불에서 태어난 파묵은 이스탄불 공과대에서 건축학을 공부했다. 82년 첫 소설 ‘제브데트씨와 아들들’을 출간, 오르한 케말 소설상과 밀리예트 문학상을 받았다. 85년에 낸 ‘하얀 성’으로 세계 문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2005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평화상과 프랑스 메디치상을 받고 200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비교문학과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이난아는 터키 전문가다.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1998) 등 40여권의 터키 문학 작품을 한국어로 번역했다.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등 5편의 한국 문학 작품을 터키어로 옮겼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