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을 받은 러시아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1918∼2008)은 제2차 세계대전에 장교로 참전했다. 그가 쓴 이야기시 ‘프로이센의 밤’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어린 딸이 매트리스 위에/ 죽어 있다. 그 위에 얼마나 많은 자들이 있었을까?/ 한 소대가, 어쩌면 한 중대가?”
1944년 1월 스탈린의 소련 군대가 독일로 들어서자마자 강간이 시작됐다. 소련 군대가 파시즘으로부터 유럽을 구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그들이 독일의 수도로 진격하는 동안 많은 여성을 강간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많은 면에서 베를린 여성과 소녀의 운명은 스탈린그라드에서 굶주리고 고통받는 병사들의 운명보다 훨씬 비참했다.”
베를린에서만 10만명으로 추정되는 여성이 강간당했고 독일 전체적으로 그 수는 최소 200만명에 이른다. 하지만 아무도 그 얘기를 하지 않았다. 독일 여성들의 전시 강간 피해 고백은 2000년대 들어서야 나오기 시작했다. 독일과 유럽의 많은 전쟁기념관에도 강간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학대’나 ‘민간인에 대한 범죄’라는 말 속에 집단강간의 역사는 숨겨졌다.
이라크에서 버마까지, 전시 강간 증언
전쟁은 우리가 사는 세계의 현실이다. 지나간 역사가 아니다. 오늘도 우크라이나 전쟁 뉴스가 쏟아진다. 미얀마에선 군부정권에 맞선 국민항쟁이 1년 넘게 이어진다. 많은 사람이 죽고 부모나 자녀를 잃고 난민이 된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전쟁에는 다른 이야기가 있다. 군인들이 점령한 도시에서 들리는 여성들의 비명. 집단강간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30년 가까이 세계 분쟁지역을 취재해온 영국 저널리스트 크리스티나 램의 책 ‘관통당한 몸’은 전시 성폭력 피해자들, 그 참혹한 비극을 통과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저자는 ISIS(이슬람국가)에 의해 강간당하고 노예처럼 팔려 다닌 여성 난민을 찾아가고 보코하람(이슬람 테러 조직)의 나이지리아 여학생 납치로 딸을 잃어버린 어머니를 만난다. 미얀마의 로힝야족 집단 학살, 르완다의 투치족 학살,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군부 정권에 의한 좌파 척결), 보스니아 민족 분쟁,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콩고 내전 등에서 강간당하고 살아남은 여성들을 인터뷰했다. 필리핀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도 나온다.
2014년 중동의 수니파 무장단체 ISIS는 이라크 제2의 도시 모술을 점령했다. 인구 180만명의 모술에서 소수민족인 야디지족 소녀 수백 명이 ISIS에 납치돼 폭행 속에서 강간당하고 팔려갔다. 열여덟 살 소녀 나이마는 12명의 남자에게 “염소처럼” 팔렸다. 나이마는 “제 삶은 그냥 강간당하는 것이 전부였다”고 얘기했다.
2016년 미얀마 군대는 소수민족 로힝야족에 대한 소탕 작전을 개시했다. 임신 8개월째였던 서른다섯 살의 사노아라는 아들의 목이 베이는 것을 봤고 군인들에게 강간을 당했다. 그들은 강간을 한 후 시노아라에게 총을 쏘았다. “저를 두 번 쏘았어요. 오른쪽 무릎과 성기에요.”
이 책에 나오는 전시 강간 피해자들의 증언은 읽기가 어려울 정도로 끔찍하다. 먼 과거의 일이 아니다. 20세기 후반과 21세기에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일이다. 전시 강간 피해자들은 젊은 여성들만이 아니다. 콩고 전쟁의 성폭력 피해자 중 상당수는 10세 미만이었다. 아기도 노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가장 소홀히 다뤄지는 전쟁범죄
그동안 전쟁이나 지역분쟁 피해의 초점은 학살과 고문이었다. 이 책은 강간과 여성에 초점을 맞춰 최근의 세계 분쟁들을 조명한다. 강간은 그동안 전쟁에 수반되는 부수적인 피해 정도로 여겨졌다. 이 책은 강간이 전쟁 무기로 체계적·의도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고발한다. 강간이 한 사람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과 미래까지 파괴했음을 보여준다.
“가족을 무너뜨리고 마을을 텅 비게 만든다. 어린 소녀를 버림받은 사람으로 만들어, 인생을 막 시작하기도 전에 끝내기를 바라게 한다. 공동체에서는 ‘나쁜 피’로 거부당하고 어머니들에게는 그들이 겪을 고통을 매일 떠올리게 하는 아이들을 태어나게 만든다. 그리고 거의 늘 역사책에서는 다루어지지 않는다.”
‘세계의 강간 수도’로 불리는 콩고에서 지난 20년간 5만5000명에 이르는 강간 피해자를 치료해온 데니스 무퀘게(2018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박사는 강간에 대해 “그건 성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무너뜨리는 수법입니다. 피해자의 내면에서 사람이라는 느낌을 빼앗는 것이지요”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전시 강간은 말해지기도, 입증하기도, 처벌하기도 어렵다. “강간은 사회가 가해자를 처벌하기보다 피해자를 낙인찍을 가능성이 더 많은 유일한 범죄다.” 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지난한 역사를 지켜본 한국인이라면 이 말에 금방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1976년부터 83년까지 7년간 지속된 아르헨티나 군부독재 기간 저질러진 좌파 여성에 대한 집단강간은 2007년 처음 공개됐다. 당시 가해자 중 강간죄로 기소된 첫 사례는 2009년에 나왔다.
저자는 “전시 강간은 가장 소홀히 다뤄지는 전쟁범죄”라고 주장한다. 1998년 강간이 전쟁범죄로 처음 처벌됐고 2000년에 국제형사재판소가 설립됐지만 전시 강간에 대한 유죄판결을 한 건도 내리지 않았다.
피해자에서 생존자로 투사로
전쟁이 나면 여성의 몸은 전장이 되고 관통당한다. 총알로, 또는 성폭력으로. 전시 강간의 유구한 역사는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21세기의 세계는 이를 비난하면서도 묵인하고 외면한다. 이 책은 이런 현실을 바꾸기 위한 시도다. 전시 강간의 실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끔찍하고, 그 피해는 영구적임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전시 강간이 어쩔 수 없는 일로 벌어지는 게 아니라 강력한 전쟁 무기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전시 강간을 끝내기 위해선 이를 중대한 전쟁범죄로 다뤄야 하며 가해자 처벌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 책은 피해자들 인터뷰에 그치지 않는다. 용감하게 피해를 증언하고 가해자를 법정에 세우기 위해 싸우는 모습을 함께 전한다. 저자는 이 여성들을 끔찍한 비극과 절망적인 고립을 뚫고 나온 생존자이자 정의를 세워나가는 투사로 묘사한다.
보스니아 전쟁 성폭력 생존자인 바키라 하세치치는 여성전쟁피해자연합을 세워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100명이 넘는 전범을 찾아내 법정에 세웠다. 아르헨티나의 피해 여성들은 강간을 범죄로 간주하는 판결을 끌어냈다. 필리핀 위안부 할머니는 일본 정부의 사과를 요구하면서 “죽을 때까지 이 목소리를 낼 겁니다”라고 말했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