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8월 시행되는 개정 자본시장법 영향으로 재계에 ‘여성 사외이사 모시기’ 바람이 불고 있다. 금융권 역시 예외는 아니다. 4대 금융지주뿐 아니라 지방금융지주까지 여성 사외이사를 잇달아 추천하는 등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 연출되고 있다. 철저하게 남성 위주로 구성돼온 금융지주 사외이사진의 성별이 다양해지면서 금융권의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이 한층 강화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반면 일부 금융그룹에선 기업의 의사 결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이사진을 능력이 아닌 성별로 고르게 됐다는 불만의 목소리도 흘러나온다.
‘여성 인재’ 모시는 금융그룹
11일 금융권에 따르면 신한금융지주는 최근 이사회에서 김조설 오사카상업대학 경제학부 교수를 신규 사외이사 후보로 추천했다. 신한금융은 “김 교수는 동아시아 경제에 능통한 대표적 경제학자로서 인권과 사회복지 분야에서 우수한 전문성을 갖추고 있다”고 추천 이유를 밝혔다. 또 이번에 임기가 종료되는 윤재원 홍익대 경영대학 교수도 재선임 추천 대상에 오르며 신한금융의 여성 사외이사는 2명으로 늘게 됐다.
KB금융지주도 지난달 24일 현재 사외이사로 있는 최명희 내부통제평가원 부원장과 권선주 전 IBK기업은행장의 연임을 각각 추천했다. 하나금융지주는 사외이사로 있던 차은영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 자리에 권숙교 전 우리FIS 대표이사를 선임했다. 우리금융지주는 임원후보추천위원회에서 법무법인 세종의 송수영 변호사를 신임 사외이사 후보로 추천했다.
지방금융지주도 예외는 아니다. BNK금융, DGB금융, JB금융은 이달 말 주주총회를 앞두고 신임 여성 사외이사 후보자를 모두 선정했다. BNK금융은 부산은행 사외이사로 재직했던 김수희 변호사를 추천했다. DGB금융은 김효신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를, JB금융은 이성엽 전 한국여성공인회계사회장을 추천했다.
‘강제 할당’에 깨진 유리천장
대형 금융회사들이 일제히 여성 사외이사 모시기에 나선 배경에는 오는 8월부터 시행되는 개정 자본시장법이 있다. 이 법은 자산 2조원 이상 상장법인의 이사회를 특정 성별로만 구성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금융그룹에 불어닥친 여풍은 강제된 것이다.
금융권에서는 여성 사외이사가 새로 합류하면서 ESG경영 강화가 이뤄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균형 잡힌 성비의 경영진은 ESG 가운데 ‘G(지배구조)’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기존 사외이사진은 대부분 남성 위주로 꾸려졌다”며 “여성 사외이사 합류는 수십년간 고착돼온 금융업계 내부의 고정관념을 깰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소비자 보호가 더 두텁게 이뤄질 수 있다는 기대도 있다. 금융회사 입장에선 그동안의 남성 중심 시각에서 벗어나 소홀하게 다뤄졌거나 미처 살피지 못했던 ‘고객 니즈’를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다른 금융권 관계자는 “고객 중심 경영의 중요성이 커진 상황에서 남성만의 시각으로는 확보하기 어려운 리더십이 발휘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보수적인 금융권이 남녀평등 가치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이정희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금까지 금융권에서는 여성들이 임금격차, 승진차별 등 문제로 불리한 위치에 있던 것이 사실”이라며 “능력 있는 여성들이 기업에서 활약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통해 활로를 열어준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실제 우리금융지주에선 개정 자본시장법으로 인해 처음으로 여성 사외이사가 추천됐다.
여성 할당제? 실효성 의문도
여성 사외이사 제도가 보여주기식에 그칠 것이라는 우려도 만만치 않다. 금융권 관계자는 “최근 적지 않은 기업에서는 능력 있는 여성 사외이사를 찾기보다는 최소한 1명만 앉혀 놓으면 된다는 식으로 사외이사 후보를 찾는 분위기도 있다”고 말했다. ESG경영 목적이 아니라 법적 규제를 피할 수단으로만 여성 사외이사를 허용한다는 것이다.
일부 금융회사에선 “성별보다는 능력 위주의 인사 원칙을 가장 중요하게 다뤄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도 나온다. 강제된 여성 사외이사 선임에 불만을 내비치는 목소리도 있다. 또 공정 가치에 민감한 MZ세대 사이에선 “사외이사 여성 할당제는 역차별”이라는 주장과 “성차별적 인사 관행을 바꾸려면 더 많은 기업이 여성 사외이사를 선임해야 한다”는 반론이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
여전히 남성 위주 사외이사진이 다수인 상황에서 소수의 여성 사외이사들이 제 목소리를 내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여성 사외이사를 법적 규제에 못 이겨 강제 할당하는 데 그칠 게 아니라 실제로 성별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기업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우형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기업마다 다르겠지만 사외이사진이 기업 의사결정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곳의 경우 여성 사외이사의 발언권은 더욱 축소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자본시장법 개정의 취지는 무색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지훈 기자 germa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