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 통합과 정치교체라는 국민의 요구

입력 2022-03-10 04:02

솔직히 말해 새 대통령에 대한 벅찬 기대보다 전쟁 같은 선거가 큰 사고 없이 끝났다는 안도가 먼저다. 승자는 환호와 희망에 부풀어 있겠지만 패자는 탄식과 절망의 한숨을 뱉고 있을 것이다. 자기 선거처럼 열심이었던 지지자들도 똑같은 심정이리라. 정치 지도자들은 무엇보다 먼저 승자의 겸손과 패자의 승복으로 이들을 감싸 안아야 할 때다.

이번 선거는 여러모로 유별났다. 코로나19 영향도 있었겠지만 선거 분위기는 새 대통령을 뽑는다는 희망보다 ‘오징어 게임’처럼 비장미가 넘쳤고, 지지 후보에 대한 호감보다는 반대 후보에 대한 미움이 더 컸다. 미움의 농도가 너무 짙어 대선 후를 더 걱정하는 이들도 많았다. 열혈 지지자들이 투표에 만족하지 않고 대선이 끝나도 진영 대결 이슈를 찾아 직접 행동에 나설 가능성 때문이다. 다행히 선거가 끝까지 박빙의 승부를 펼치며 국민의 관심을 끌어올렸고 유력 후보들은 점차 중도 부동층을 향한 통합 메시지를 강조했다. 야당 후보들은 선거 초기 분노와 복수심에 불타는 정권교체 여론만 믿고 승리를 장담했지만 민심은 그에 만족하지 않고 분열의 정치를 끝내는 정치의 전환과 승자독식의 정부가 아니라 진영을 넘나드는 국민통합의 정부를 요구했다. 대선의 시대정신이 귀납적으로 정의됐다고 하겠다.

선거를 10여일 앞두고 더불어민주당은 부랴부랴 정치개혁 방안을 당론으로 의결해야 했고 국민의힘도 안철수 후보와의 심야 담판을 통해 정권교체를 넘어 정치교체로 나아갈 것이며 국민통합 정부를 꾸리겠다고 약속했다. 이 중에는 개헌이나 선거제 개편과 같이 시간이 좀 걸리고 여야 타협이 필요한 과제도 있지만 책임총리나 비례대표용 위성정당 금지, 결선투표제와 같이 이미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된 과제도 있다. 흥미로운 미래 담론 하나 없는 역대급 비호감 선거로 출발했지만 국민은 최종적으로 다음 정권에 정치교체와 국민통합이라는 숙제를 내준 셈이다.

이런 흐름에 따라 새 대통령 당선인은 오늘부터 통합을 위한 행보로 공식 일정을 시작했으면 좋겠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 경쟁했던 후보들에게 직접 감사 인사와 함께 보복 정치 근절을 다짐하고 위기 극복을 위한 협조를 당부한다면 더없이 훌륭한 출발일 것이다. 그러나 다음 정권이 진정으로 국민통합 정부를 지향할지는 결국 인사 정책으로 판가름 날 것이다. 특히 어떤 총리를 지명하고 그에게 어떤 권한을 부여하느냐를 보면 앞날을 가늠할 수 있다. 처음부터 국회 추천 총리나 완전 책임총리까지 가기는 어렵더라도 선거 때 약속했던 대로 진영을 넘나드는 통합형 총리와 국내 경제사회 정책 전반을 일차적으로 책임지도록 하는 직무할당형 부분 책임총리는 대통령 결심만으로도 가능하다. 큰 정치개혁 과제들은 여야 합의에 맡기더라도 새 대통령의 보복 정치 근절 약속과 통합형 정부의 구성만으로도 극단으로 치닫는 진영 대결에 제동을 걸 수 있을 것이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구성과 함께 대통령 당선인이 주도하는 국민대타협위원회를 설치할 수도 있다. 인수위에서 새 정부 국정과제를 선별하는 것이 우선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론 야당과의 협치를 위해 새 정부 출범 전부터 대화와 타협에 나서면 좋을 것이다. 선례를 찾는다면 1998년 1월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이 김영삼 대통령과 협의해 노사정위원회를 설치하고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을 도출했던 사례가 있다. 물론 외환위기라는 막다른 골목에서 끌어낸 대타협이었지만 그 형식은 좋은 참고가 된다. 이번에는 여야의 공통 대선 공약을 비롯해 그동안 여야가 정치적 이해득실을 따지며 미루기만 했던 국가적 난제에 대해 큰 가닥을 잡아주는 기본합의(framework agreement)를 도출할 수도 있다. 여야 원내대표들만이 아니라 정계와 학계를 대표하는 소수의 원로급 인사들이 참여해 정치적 이견을 조율하고 폭넓은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가면 더욱 좋을 것이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승리의 꼭짓점에서 승자가 패자에 손을 내밀어 협력을 구하고 더 큰 국민통합 정치로 나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얘기다. 그러나 선거 막바지에 양당이 약속한 대로 정치교체와 국민통합 정부의 길로 가기 위한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은 국민 배신이자 또 다른 실패로 가는 지름길이다. 5년 후 초라한 결말을 피하려면 여건이 좋을 때 많이 벌어 놓아야 한다.

최영기 한림대 객원교수 (전 한국노동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