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달러 대신 루블화로 상환… 기업들 “돈 갚지 않겠다는 선언”

입력 2022-03-09 04:03
국제사회의 대러 추가제재 가능성이 커지면서 러시아의 루블화 가치가 7일(현지시간) 폭락해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사진은 8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위변조대응센터에서 한 직원이 루블화를 펴 보이고 있는 모습. 뉴시스

러시아가 한국을 비우호국가로 지정하면서 러시아와 거래하는 기업은 타격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현지 진출 기업은 이번 조치에 따른 피해가 크지 않더라도 사태 장기화에 따라 원·부자재 수입에 차질을 빚을 수 있어 예의주시하고 있다.

8일 산업계에 따르면 러시아에 진출했거나 러시아와 거래하는 한국 기업은 40여곳에 이른다. 러시아가 비우호국가에 포함된 외국 채권자에 대한 채무를 달러가 아닌 루블화로 상환할 수 있게 하면서 피해는 불가피하다. 루블화는 사상 최저 수준으로 가치가 폭락하고 있다. 국제사회가 러시아를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스위프트)에서 배제하면서 채무 상환 자체가 불가능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러시아에 제품을 수출한 기업이 대금을 떼일 수도 있는 것이다. 산업계 관계자는 “루블화 가치가 70%나 폭락한 상황에서 러시아의 이번 조치는 사실상 돈을 갚지 않겠다는 선언”이라며 “러시아와 거래하는 한국 기업들이 채무불이행 위험에 노출돼 있다”고 진단했다.

러시아 시장에서 높은 점유율을 기록하는 기업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지난해 러시아에서 기아차 20만5801대, 현대차 17만1811대를 판매하며 각각 2, 3위를 차지했다. 한국이 비우호국가로 지정되면서 현지 소비자에게 외면받을 처지에 놓였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국제사회의 러시아 제재에 동참해야 한다는 명분은 지켜야겠지만 글로벌 실적에 큰 타격을 입는 건 피할 수 없다”고 말했다.

러시아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기업의 경우 ‘루블화 채무 상환 조치’에 따른 단기적 영향은 적을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는 모스크바 인근 칼루가, LG전자는 모스크바 외곽 루자에서 공장을 운영 중이다. 전자업계 관계자는 “완제품은 기본적으로 현지 통화로 거래하기 때문에 러시아의 조치가 미칠 영향은 크지 않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일부 외환 거래에 영향을 받을 수 있지만 수출 자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만큼 액수가 크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러시아에 진출한 한국 식품기업도 비슷한 상황이다. 오리온, 롯데제과, 팔도(현지 법인명 도시락)는 각각 러시아에 법인을 두고 현지에서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현지에서 생산과 판매가 이뤄지기 때문에 수출 대금과 관련한 문제는 없다.

그러나 사태 장기화, 러시아의 추가 반격이 이어지면 원·부자재 공급망에 구멍이 생길 수밖에 없다. 러시아 산업통상부는 6일(현지시간) 발광다이오드(LED), 마이크로칩 등의 소재로 쓰이는 합성사파이어의 수출을 중단할 수 있다고 밝혔다. 수출 제한 조치를 할 원·부자재 범위가 넓어질 수 있다.

동시에 러시아 현지 공장으로의 수출입에 차질이 발생해 운영난에 봉착할 가능성도 있다. 러시아 내 수요 위축, 루블화 가치 하락에 따른 가격경쟁력 저하 등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식품업계 관계자는 “사태가 장기화되면 재료 공급이나 수금, 매출 실적 등에서 어려움이 생길 수 있다. 상황이 길어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지켜보는 중”이라고 전했다.

이용상 문수정 양한주 기자 sotong20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