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웃기는 여자다. 하루는 이렇다 할 이유 없이 자신감이 넘쳐 온 천지가 내 것 같다가도, 또 하루는 사는 게 다 무엇인가 싶어 땅속으로 꺼져 버리고 싶기도 하다. 나는 정말 웃기는 여자다. 작가 지망생 시절 묵직한 글을 쓰는 소설가로 성장하기를 빌고 또 빌었건만, 기도가 부족했는지 코믹 에세이스트가 되어 독자의 배꼽을 뺄 궁리만 하고 있다. 내가 봐도 내가 쓴 글이 심형래 뺨치게 우스워 이 일이 적성에 딱 맞는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기분이 울적한 날에는 한 줄 한 줄 써 내려가는 일이 여간 괴롭지 않다.
모 일간지 마감을 앞둔 어느 주말도 그랬다. 화창한 날씨와는 정반대로 마음속에 먹구름이 가득했다. 기분 같아서는 밥벌이의 괴로움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놓고 싶었으나, 세상 어느 코미디언이 무대에 올라 신세를 한탄한단 말인가. 나는 유사 코미디언답게 암담한 기색을 전혀 내비치지 않은 채 글을 마무리 지었다. 주말에도 애쓰시는 담당 기자의 노고에 감사드린다는 살가운 인사 역시 잊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답신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태껏 원고를 잘 읽었다는 답신을 받아 본 적이 일절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필시, 내 원고가 수준에 미달해 게재하기 곤란하다는 소식을 알리려는 불운한 편지렷다! 떨리는 손으로 이메일을 열었으나 예상과는 다른 내용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담당 기자는 주말도 없이 일하는 당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한편 대기업 임원은 주7일 근무하는 분도 많다고 하니 불평하기는 좀 애매하다며 스스로를 어르고 있었다.
원고 부탁드립니다, 마감일은 몇 월 며칠입니다, 감사합니다. 자동 응답기처럼 꼭 필요한 말만 딱딱하게 반복하던 기자가 이런 푸념을 다 하시다니. 일하기가 퍽이나 고달프셨던 모양이구나. 웃음이 피식 새어 나옴과 동시에 동병상련의 아픔이 느껴졌다. 또한 이 사람 저 사람의 괴로움을 그러모아 만들어진 신문이 짐짓 근엄한 분위기를 풍기며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간다는 사실에 아무도 모르게 혼잣말을 읊조렸다. 음, 세상은 요지경이로구먼.
먹고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자가 비단 우리뿐이랴. 그해 겨울 집 앞 카페에 가던 길, 일에 시달리는 또 다른 일꾼 무리를 마주쳤다. 시커먼 얼굴이 벌겋게 얼어 버린 아저씨들이 건물 4층 높이까지 뻗은 가로수에 사다리차를 타고 올라가 앙상한 나뭇가지에다 장식용 전구를 감고 있었다. 쌩쌩 부는 바람을 따라 요동치는 나뭇가지가 그들의 얼굴을 후려쳤다. 바닥에 던져둔 가방 곁에서 나뒹구는 찌그러진 캔 커피와 빈 담뱃갑이 난데없는 회초리질을 당하는 그들의 심정을 대변해 주었다. 줄지어 늘어선 가로수에 전구를 감으려면 고생깨나 하리라.
따뜻한 카페에 앉아 그보다 더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칼바람에 혼쭐이 나는 그들을 한참 올려다보았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커다란 촛불이 되어 일렁이는 창밖의 가로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추위에 곱은 투박한 손으로 만들어 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치 고운 정경이었다. 회색빛 도시를 환히 밝히는 가로수 불빛을 겨우내 바라보며 생각했다. 세상을 이롭게 하는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꼭 그만큼의 수고로움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영영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겨울이 밀려오는 봄기운을 이기지 못해 슬금슬금 뒷걸음질 친다. 창문 가득 쏟아져 들어오는 따스한 햇볕에 엉덩이가 연신 들썩이지만,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인 나에게 봄나들이는 언감생심 남의 나라 얘기다. 아쉬운 대로 바람이라도 쏘이러 거리로 나섰다가 그때 그 사다리차를 마주쳤다. 뭉근한 봄바람을 맞으며 가로수에 감긴 전구를 거두는 아저씨들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당신들 덕에 올겨울이 참으로 아름다웠노라고 소리 없는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때마침 주머니 속에 든 휴대폰이 울렸다. 원고 부탁드립니다, 마감일은 몇 월 며칠입니다, 감사합니다. 응석을 부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기계 같은 말을 반복하시는 담당 기자였다. 하늘도 무심하셔라. 밭은 마감일에 숨이 턱 막힌다. 하지만 나와 기자의 수고로움이 꼭 그만큼의 아름다움으로 승화돼 세상 한구석을 빛낼 거라 믿으며 마음을 다잡아 본다. 씩씩하게 거리를 걷다가 신문 가판대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회색빛 신문 위로 반짝, 봄볕이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