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반나절 풀꽃문학관에서 보냈다. 해마다 설날이 지나고 며칠씩 정원을 돌보는 일을 하는데 그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무엇보다 참나무 잎새를 치워주어야 했다. 겨우내 꽃밭 위에 쌓여 있는 참나무 잎새는 쉽게 썩지 않아 새롭게 싹트는 꽃들에는 방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작업복 차림에 모자 쓰고 마스크까지 하며 일을 하는데도 관광객들이 용케 알아보고 인사를 한다. 글쎄, 그런 때 나는 글 쓰는 사람이 아니고 일하는 사람이라 그냥 모른 체하고 지나가면 좋을 텐데 꼭 인사를 챙기고 더러는 사진을 찍자 하고 한발 나아가 책에 사인까지 청한다. 작업에 방해가 되기에 조금은 망설여지기는 하지만 먼 데서 모처럼 찾아온 정성을 생각하면 모른다고만 할 수는 없는 일. 함께 사진도 찍고 장갑을 벗어 사인도 해주고 이야기도 나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는 법. 그렇게 이야기하다가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일종의 횡재다.
오늘이 딱 그랬다. 경기도에서 왔다는 젊은 여인네 둘과 이야기할 때다. 그 가운데 한 분의 이야기가 특별했다. 그녀는 나의 시를 많이 읽고 있었다는데 그중에서도 ‘풀꽃’이란 시가 좋다면서 자기도 풀꽃을 좋아한다고 했다. 하지만 자기는 굳이 풀꽃의 이름을 알려고 하지 않고 그냥 풀꽃 자체로만 좋아한다고 했다. 이유는 풀꽃 이름을 알고 풀꽃을 보면 무언가 자기가 알고 좋아하는 풀꽃이 전혀 다른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이었다. 그 여인네의 말을 듣는 순간, 마음속으로부터 쾌재를 불렀다.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를 쓰는 마음이다. 애당초 시인이란 언어에 갇혀진 본래의 의미와 본질을 찾아서 해방하고 확대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가령 ‘아내’란 말이 있다고 하자. 아내는 남편에 맞서는 성적인 짝이지만 때로는 누이이고 친구이고 나아가 모친과 같은 특성을 고루 지닌 사람이다. 그걸 아내라는 말로 규정할 때 그 말은 한정적인 것이 되고 틀에 갇혀버리고 만다. 만약 아내에 대해 시로 썼다면 그것은 아내란 말 속에 숨겨진 보다 많은 의미를 찾아내는 작업이 될 것이다. 그것은 오늘 만난 젊은 여성의 풀꽃에 대한 생각과 매우 비슷한 것이다. 이렇게 나는 풀꽃문학관을 찾는 평범한 방문객들로부터도 많은 것을 깨우치고 배운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것이 오늘도 풀꽃문학관에 나가서 반나절 힘겹게 보낸 결과이고, 또 일하는 중간에 장갑 벗고 시집에 사인을 해주면서 얻은 귀중한 소득이다.
그러고 보니 아내의 말이 떠오른다. 며칠 전 아내는 자기가 산책하는 길에서 본 예쁜 꽃이라면서 휴대폰으로 꽃 사진 몇 장을 찍어서 내게 보여주었다. 한눈에 그것은 봄마다 피는 흔한 풀꽃이었다. 꽃 이름은 큰개불알풀. 바닷물 빛 파랑으로 피어나는 꽃이 여간 예쁜 모습이 아니다. 꽃 이름을 알려주자 아내가 정색하며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꽃 이름이 그래요! 꽃이 이렇게 예쁜데 왜 꽃 이름을 그렇게 험하게 지었어요. 정말로 큰개불알풀의 꽃은 전혀 꽃 이름과 닮아 있지 않다. 바로 이것이 문제다. 이것이 언어에 갇혀진 사물의 본질이요 진가이다. 이것을 밖으로 꺼내주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시를 쓰는 일이다. 길게 설명해주었을 때 아내는 다소 안도하는 눈치였다.
더불어 나는 아내에게 다른 말을 들려주었다. 그러게 말이오, 이해인 수녀님도 이 꽃 이름이 못마땅하고 상스러워 어떤 글에선가 큰개불알풀이라고 부르는 대신 ‘봄까치꽃’이라 부르자고 쓰신 적이 있답니다. 내 말에 아내는 더욱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러하다. 봄까치꽃은 모진 겨울 추위를 이기고 양지쪽에 피어나는 꽃. 우리도 한 사람씩 봄까치꽃이 될 필요가 있다.
나태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