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너구리에게

입력 2022-03-09 04:05 수정 2022-03-09 04:05

겨울잠은 잘 잤는지? 겨우내 날씨가 그리 춥지 않아 자다 깨다 했을 듯. 지난가을 서울 지양산 자락에서 마주쳤을 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보던 네가 떠올랐어. 참, 그 후 그 부근에서 맛난 먹이에 섞어 흩뿌려둔 약 혹시 먹었니? 너희 식구들이 조금 늘어나 간혹 마주치다 보니, 사람들이 혹여 너희들 때문에 광견병 걸릴까 걱정하기에 고육지책을 낸 거니 이해해줘.

너희들이 겁이 많아 사람에게 공격적이지 않다는 건 잘 알지만 사실 반려견이나 길냥이들 만나면 까칠하게 구는 건 맞잖아. 지난가을 연의공원에서 길냥이들 밥 뺏어 먹다 캣맘들께 혼나기도 했지? 겨울잠 잘 너희들도 많이 먹어야 하는데 길냥이만 챙기는 것 아니냐며 캣맘들 원망은 마. 자연 속에서 누가 더 배고프고 힘든지 두루 잘 헤아려 돌보기란 솔직히 좀 어려워. 겨우내 몰려다니는 참새나 뱁새들도 겨울 지나면 삼분지 일은 영양 부족으로 얼어죽는데 누가 챙겨주기나 해? 위기종이니 기념물이니 크고 화려한 친구들은 이래저래 챙겨도 말야.

지난달이었나, 해외에서 불법 유통되는 야생동물에서 코로나19처럼 사람에게 유해한 바이러스들이 잔뜩 검출됐다는 뉴스를 봤어. 새로운 소식처럼 보이지만 늘 존재해 왔던 현실은 외면하고, 사람이 만든 문제를 죄 없는 동물에 덮어씌우는 익숙한 방식이지. 요즘 너희에게 거의 학살에 가까운 대접을 한다는 북유럽도, 사실 동아시아에서 내내 잘 살던 너희들을 100년 전 가죽 얻겠다고 동유럽으로 데려갔다 퍼져나가 생겨난 결과잖아.

여하간 새봄 오니 좋네. 막바지 기승을 부리지만 팬데믹도 끝이 보이는 것 같고. 연의공원 미루나무에도 물이 오르고 있어. 새봄에는 서로의 자리를 잘 지켜 우리가 좀 덜 마주치도록 노력할게. 숲은 더 풍요롭게 가꾸고, 사람 욕심만 챙겨 무분별하게 설치한 샛길도 시설들도 조금씩 걷어내고, 봄맞이 줍깅 대청소도 하면서 말야. 마주치지 못해도 좋지만 건강히 잘 지내. 안녕.

온수진 양천구 공원녹지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