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차 못 온대” 밤새 물호스 잡고 마을 지킨 주민들

입력 2022-03-08 00:04
경북 울진군 울진읍 온양1리 주민 오규석(54)씨가 마을을 덮쳐오던 불길에 맞서 주민들이 사투를 벌였던 상황을 재연하고 있다. 오씨는 지난 5일부터 불침번을 서며 집 주변에 수시로 물을 뿌리고 있다. 울진=최현규 기자

경북 울진군 울진읍 온양1리에 사는 오규석(54)씨는 지난 5일부터 밤을 새우며 집 앞 불침번을 서고 있다. 그는 수시로 양동이에 물을 가득 받아 집 주변에 뿌린다고 했다. 7일에도 해가 뜨자마자 주변 대나무밭과 목초지에서 연기가 나는지 살펴봤다. 그는 국민일보와 만나 “간밤에 타는 냄새가 나서 걱정되는 마음에 마을을 계속 둘러보고 있다”고 말했다.

산불로 발생한 연기는 지난 6일 밤부터 마을 일대를 모두 휘감아 동해 수평선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오씨 옆집에 사는 박모(80)씨도 이른 아침부터 집 담벼락을 한 바퀴 돌며 재로 변한 솔잎을 손으로 주워 쓰레기통에 버렸다. 박씨는 “작은 불씨라도 놓치는 게 없는지 점검해야 한다”고 했다.

이들은 산을 타고 내려온 불길이 마을을 집어삼킬 뻔한 아찔한 순간을 겪은 이후 계속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있다. 앞서 지난 5일 오후 1시43분쯤 온양1리 마을에는 “산불이 근접했으니 집에서 나와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라”는 대피령이 떨어졌다. 대피령에도 오씨는 마을 입구 30m 부근까지 튀어오는 불똥을 정신없이 발로 밟아 껐다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 살았던 마을이 불에 타 사라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거센 바람으로 몸집을 키운 화염은 차츰 마을을 감쌌다. 인근 언덕에 불이 닿자 목초지와 대나무밭이 타들어 갔고 5~6m 높이의 대나무는 순식간에 불기둥으로 변했다. 다급해진 오씨는 오후 2시10분쯤 119에 네 차례 전화했다. “마을이 모두 불에 탈 수 있다. 빨리 불을 꺼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대부분 인력이 울진 일대 산불 진화에 투입된 소방서에서는 “대피령에 따르라”고만 안내할 뿐이었다.

오씨는 급한 마음에 집으로 달려가 평소 청소할 때 쓰던 10m 길이 호스를 연결해 무작정 불을 향해 뿌렸다. 놀란 박씨도 수도에 호스를 연결하고 불타는 나무에 물을 뿌렸다. 곧 다른 마을 주민들도 양동이에 물을 담아 나르며 함께 진화에 나섰다. 화마와 맞서 싸운 지 3시간여 지난 오후 6시쯤에야 불의 기세는 겨우 잦아들었다. 마을 사람들의 사투 덕에 마을 초입만 불에 탔고, 건물에는 별다른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다. 박씨는 “내 집은 내가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미친 듯이 물을 뿌렸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일단 불은 물러갔지만 여전히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울진 산불은 수시로 방향이 바뀌는 바람을 등에 업은 채 기세를 유지하고 있다. 소방대원들이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마을 인근에 진을 치고 밤샘 대기하며 ‘민가 저지 방어선’ 역할을 하고 있지만 어디로 불지 모르는 바람이 변수다. 산림청 화재진압 요원들이 야간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불붙은 골짜기로 내려가 직접 진화작업을 계속해야 하는 것도 바람으로 불이 더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2년 전 고성 산불 때 진화에 나선 최승일 산림청 공중진화대 주무관은 “고성 산불 때는 바람이 바다 쪽으로 불어서 확산 범위가 작았지만 울진은 풍속과 풍향이 시간에 따라 달라져 불이 산을 옮기며 확산한다”고 말했다. 그는 고성 산불보다 쉽게 불길이 잡히지 않아 이틀 동안 밤샘 진화작업을 했다고 전했다. 한 달 전 영덕과 합천 산불 진화를 위해 나선 후 아직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그의 바람은 하루빨리 큰 불길이 잡히는 것이다. 그는 “큰 불길이 잡혀 어서 아들과 딸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울진=전성필 성윤수 기자 f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