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전쟁에 얼굴이 있다면

입력 2022-03-08 04:08

라떼는, 고등학교 때 교련이라는 과목이 있었다. 여고생들은 전쟁 중에 부상당한 군인을 돌봐야 한다며 압박붕대와 삼각건을 감는 실기시험을 쳤다. 연습을 하다 보면 누군가는 꼭 붕대를 놓쳐 붕대가 데구루루 굴러가고, 그걸 허겁지겁 쫓아가는 걸 보며 다 같이 까르르 웃곤 했다. 마무리해야 할 때 붕대가 모자라면 네 머리가 커서 그렇다느니, 네 손재주가 원래 그렇다느니 짐짓 아옹다옹했다. 전쟁에 대한 생각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소란스럽고 활기찬 시간이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건 실제로 붕대를 쥐고 전선에 뛰어든 여성들의 이야기 때문이다. 지난달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다시 주목받는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서다. 그는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러시아의 혈맹 벨라루스 국적의 작가로 반전 반독재 운동을 펼쳐왔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여성들의 전쟁 역사서다. 100만명이 넘는 옛 소련 여성들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책은 그들 중 200여명의 인터뷰를 담았다. 전투기 조종사, 저격수, 기관총 사수, 정찰병, 탱크병, 간호병, 지하공작원…. 임무도 다양했다. 놀라운 것은 그들 상당수가 16~18세의 소녀 병사였다는 점이다. 너무 어린 나이에 입대해 전투 중에 첫 생리를 하고, 소총보다 작았던 키가 전쟁을 치르면서 자라는가 하면, 열아홉 살에 머리가 하얗게 세 버린 소녀들이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붉은 살점의 고기가 줄줄이 걸린 시장에 가지 못하고, 귀한 블라우스를 선물받았지만 빨간색이어서 한 번도 입지 못했노라는 여인들도 있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조국이 그대들을 부른다’ ‘일어나라, 위대한 나라여’ 같은 글귀와 노래에 이끌려 자발적으로 전선으로 향했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여자들의 전쟁 이야기에는 애국심을 들끓게 하는 명예로운 희생이나 숭고한 이상, 승리의 희열, 감동적인 영웅담이라고는 없었다. 기관총 사수와 연락병이 사랑에 빠져 독일군 낙하산으로 웨딩드레스를 만들어 입고 참호에서 결혼식을 올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책에 등장한 전장의 묘사는 너무 참혹하고 생생해 하나도 인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은 여성 영웅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보다 노골적으로는 이런 책을 읽고 누가 싸우러 나가겠느냐는 출판 검열관의 제동으로 한동안 출간되지 못했다고 한다.

이 책의 영어 제목은 ‘The Unwomanly Face of War’로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전쟁의 얼굴’ 정도의 뜻이다. ‘전쟁의 얼굴’이라는 표현처럼 전쟁에 얼굴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어쩌면 인간의 얼굴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의 작품 ‘전쟁의 얼굴’을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초현실주의 거장들’ 전시회에서 볼 수 있는데, 뱀들이 꿈틀대는 참수된 얼굴이 페르세우스에게 목이 잘린 그리스 신화 속 괴물 메두사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리아 마르첸코라는 우크라이나 작가가 2015년 공개한 똑같은 제목의 작품은 다름 아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초상화였다. 러시아 침공의 빌미가 된 돈바스 지역 내전에 사용된 5000개의 탄피로 만든 작품으로, 전쟁에 얼굴이 있다면 그것은 독재자의 얼굴이리라는 메시지가 선명했다.

알렉시예비치의 이름은 며칠 전 국제펜클럽 명의의 반전 선언문에 동참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명단의 첫 번째에 올라 있었다. 선언문은 우크라이나 사태가 ‘푸틴의 전쟁’임을 명시하고 ‘평화가 승리해야만 한다’는 문장으로 끝맺었다. 평화를 위한 기도가 필요한 때다.

권혜숙 인터뷰 전문기자 hskw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