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부터 소액을 보내며 후원하는 유엔난민기구(UNHCR)에서 ‘우크라이나 긴급구호’라는 제목으로 이메일을 보내왔다. 지난달 25일 저녁에 도착한 메일인데 지난 5일에야 확인했다. 우크라이나가 침공당한 다음 날 유엔난민기구가 후원자들에게 보낸 메일은 그곳 대표의 말로 시작한다. 필리포 그란디 고등판무관은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사람들이 안전을 찾기 위해 집을 떠나기 시작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전했다.
그리고 열흘도 안 돼 우크라이나를 탈출한 현지인은 120만명을 넘겼다. 웬만한 도시 두어 곳이 텅 비어버린 셈이다. 그란디 고등판무관은 지난달 28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보낸 성명에서 “분쟁이 즉시 중단되지 않는 한 우크라이나인들은 계속해 피란할 것”이라며 “우리는 앞으로 며칠이나 몇 주 안에 많게는 400만명의 난민(이 발생하는 상황)에 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피란민은 대부분 여자와 아이들이다. 그들은 입대 명령을 받은 남편 연인 아들 형제 아버지를, 또 다른 사정으로 그곳에 남기로 한 가족을 전쟁터에 남겨두고 피란길에 올랐다. 어떤 이들은 서로를 다시 볼 수 없을지 모른다. AP통신이 전한 지난 3일 수도 키이우 기차역 풍경 일부를 그대로 옮긴다.
‘한 여성이 파란색과 노란색(으로 칠해진) 열차의 출입구에 쪼그려 앉았다. 그의 남편은 아래 플랫폼에 서서 마지막이 아니기를 바라는 입맞춤을 하기 위해 목을 길게 뺐다.’ ‘열차 문이 닫히자 여성은 두 살 난 아들을 안아 올렸다. 아이는 웃으며 작은 손을 얼룩진 창문에 댔다. 러시아 침략자들과 싸우기 위해 뒤에 남은 아버지에게 작별인사를 하려고.’ ‘할머니는 폴란드 국경으로 가는 열차를 탄 딸과 손자에게 작별인사를 하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는 기차역 벽 쪽으로 등을 돌렸다. 두 손을 입에 대고 눈을 꾹 감았고, 눈물을 흘렸다.’ AP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도시들을 침략하고 폭격한 이후 1주일 동안 이 나라 전역에서 반복된 작별인사”라고 덧붙였다.
이번 전쟁의 도화선인 우크라이나 동부 분쟁은 그동안 관심을 받지 못했다. 내가 받은 이메일에서 유엔난민기구는 “미디어에서 그동안 자주 다루지 않았지만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서는 지난 7년간 충돌이 계속돼 왔다”고 했다. 이 설명은 마치 기자인 나를 책망하는 것처럼 들렸다. 난민 후원을 시작한 시기도 지금처럼 해외 소식을 전하던 때였다. 중동 담당으로 틈틈이 시리아 내전 기사를 썼다. 내전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당시에도 장기화한 상태라 화학무기 공격으로 민간인이 무더기 사상하는 정도의 일이 없고서는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 참극이 벌어지면 기사가 쏟아졌다.
기자의 책상머리에서 비극은 솔깃한 글감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기사에서 필자들은 글재주를 동원해 독자의 감정을 쥐어짜려 하거나 특정 사례를 앞세워 간편하게 희망을 운운한다. 번듯한 글이 타인의 비극을 끝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경우는 많지 않다. 문학과 달리 현실을 다루는 기사는 멋진 글로 완결한다고 그 너머의 비극이 종결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비극을 하루 글감으로 써서 배출하고 또 다른 비극을 찾는 일상을 반복하다 시리아 난민 구호에 푼돈이나마 보태기로 했다.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죄책감 따위를 덜기 위한 방법이었다고도 생각한다.
미국 국무장관은 우크라이나가 완승할 수 있다고 했지만 완승은 손실 없이 이겨야 가능한 것이다. 이미 많은 것이 망가졌다. 다시 그란디 고등판무관의 말을 인용한다. “전쟁에는 승자가 없다. 오직 전쟁으로 고통받는 수많은 생명이 있을 뿐.” 아무래도 지갑을 더 열어야 할 것 같다.
강창욱 국제부 차장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