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공약, 안 지키면 안 될까

입력 2022-03-07 04:05

벌써 이런 말을 꺼내기는 좀 민망하지만, 여야 대선 후보들이 취임 후에 제발 공약 좀 안 지켰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대통령이 공약을 지키는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봐야 할 언론의 한 구성원이 무슨 말이냐고? 그만큼 후보들의 공약이 부실하기 때문이다. 자칫 공약을 지킨다는 이유로 현실과 동떨어지는 정책을 밀어붙이거나, 막대한 나랏돈을 쓰는 일이 재현될까 걱정스럽기도 하다.

모두가 느끼듯 이번 대선은 역대급 진흙탕 선거다. 일반적으로 대선 같은 전국 단위의 선거를 거치면서 누군가는 국가적인 어젠다를 제시하고 이에 대한 토론과 검증을 통해 논의가 진전되면서 사회가 한 발짝이나마 진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대선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럴 요소가 안 보이는 게 문제다. 기필코 정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처절한 몸부림과 ‘닥치고 정권교체’란 당위론이 형태만 바꿔가면서 서로 악악거릴 뿐이다. 선거가 이렇게 굴러가니 자연히 다른 때보다 정책에 대한 깊이 있는 토론도, 공약에 대한 치밀한 상호 검증도 사라졌다.

대선 공약은 차기 정부의 주요 국정과제가 된다는 측면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구조적으로 공약 설계 과정에서부터 허술한 부분이 적지 않다. 일단 공약 자체가 정치적 선명성이나 득표를 목적으로 하다 보니 현실에 부합한지에 대한 치밀한 검증은 후순위다. 상대 후보보다 더 확실하게, 더 많이 지원해줘야 하다 보니 공수표가 남발된다. 캠프의 제한된 인력 풀과 정보 제약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점도 부실 설계의 원인이 된다. 국회에서 법 하나를 제정하더라도 공청회를 열어 여러 쟁점을 점검하는데 주요 국정과제가 될 수 있는 공약이 그 정도 검증조차 거치지 않는 셈이다.

지난 대선 때 최저임금 공약이 대표 사례다. 당시 모든 여야 대선 후보들이 ‘최저임금 1만원 달성’을 공약했지만, 막상 현 정부 초기 2년간 8350원까지 29% 올렸는데 고용이 위축되고 경제가 발작을 일으켰다. 여야가 차분하게 머리를 맞대도 이런 후폭풍을 예견하기 어려운데, 이번 대선처럼 극한 대결만 일삼은 상황에서 공약에 대한 점검은 기대하기 어렵다.

이번 대선에서 여야 후보들이 내놓은 공약은 자체 추산만으로도 이미 300조원(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 266조원(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의 재원이 들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내용은 부실하다. 어떻게든 이기는 게 중요하다 보니 아예 공약 자체가 상대방과 비슷하거나 ‘묻고 더블로 가’ 식의 공약이 한두 개가 아니다. 주택 공급,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 철도 지하화 등 개발 공약이 대표 사례다.

충분히 논의되지 않은 공약도 있다. 이 후보의 토지배당제(국토보유세) 공약이 대표적이다. 기존 종합부동산세 대신 모든 토지 보유자에 대해 토지가격의 일정 비율을 과세해 기본소득 재원으로 쓰자는 구상이지만, 공시가격 차이에 대한 조세 저항도 클 것이고 기존 세금 제도와의 상충 우려도 크다. 실제 지급 가능한 기본소득 금액도 적어 가성비도 떨어진다. 이 후보는 “국민이 반대하면 무리하게 추진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 후보가 집권하면 공직 사회 특성상 이 정책은 어떻게든 추진될 가능성이 크다.

대선 이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공약에 대한 조율 과정을 거치겠지만, 인수위 기간이 짧고 인사나 정부 조직 개편 등을 챙기다 보면 인수위에서의 공약 조율은 수박 겉핥기식이 될 가능성이 작지 않다. 부실한 공약이 그대로 국정과제로 내려오면 불필요한 데에 나랏돈이 들어가고 정부에도 두고두고 부담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다음 대통령은 솔직하게 “죄송합니다. 선거 땐 가능할 줄 알았는데 막상 해보려 하니 이게 아니었습니다” 하고 용기 있게 인정할 줄 알았으면 좋겠다. 공약을 어겼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겠지만 그만큼 예산과 행정력 낭비를 막을 수 있다. 공수표 남발은 지겹게 봤으니 뿌린 공수표를 용기 있게 거둘 줄도 아는 유연한 지도자를 보고 싶다.

이종선 경제부 기자 rememb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