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3월 9일 서울 중구 호암갤러리에서 ‘박대성 작품전’이 개막했다. 해방둥이 박대성(77)의 나이는 당시 43세. 이례적이었다. 이전까지는 이중섭 남관 권진규 성재휴 박래현 등 1910~20년대에 태어난 원로와 작고 작가 혹은 루오 부르델 피카소 등 서양미술 거장의 전시가 열리던 곳이었다.
40대 신진에게 기회가 돌아온 사연은 있다. 86년 말∼87년 초 ‘백자 특별전: 우리 백자의 어제와 오늘’을 했다. 반응이 신통찮았다. 고민하던 이건희 당시 삼성그룹 부회장에게 이호재 가나아트 회장이 차라리 젊은 작가 전시를 해보는 건 어떠냐고 제안한 게 계기가 됐다.
최근 서울 광화문에서 기자와 만난 박 화백은 “전시 개막 1년 전쯤이다. 경기도 팔당의 작업실로 손주환 중앙일보 이사 등 관계자 3명이 찾아왔다. 내년에 전시를 하자고 했다”며 “처음엔 부담스러워 실력을 더 키워서 하겠다며 고사했다. 케네디도 박정희도 40대에 대통령 했는데, 못할 건 뭐 있냐고 설득해 응했다”고 회상했다. 서울대와 홍대가 서로 양보하지 않아 중앙미술대상을 받은 독학파인 그가 낙점된 것이라고 한다. 그는 33세이던 78년 제1회 중앙미술대상에서 대상 없는 장려상을 받았고 이듬해 2회에선 대상까지 거머쥐었다.
1년을 준비해 600평 넘는 개인전 공간에 대작 100여점을 걸었다. 제주, 설악산, 해남 등 전국을 돌며 사생한 실경수묵화다. 신진 작가의 전시는 처음이라 주최 측은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관람객 숫자, 작품 판매, 도록 판매 등 모두 성공적인 기록을 세웠다.
전시가 끝난 후였다. 한 해 전 창업주인 선친 이병철 회장이 별세면서 막 삼성의 후계자가 된 이건희 회장이 그를 태평로의 삼성본관 집무실로 불렀다.
이 회장: (악수를 청하며) “존경합니다.”
박 화백: (깜짝 놀라) “왜, 왜요?”
이 회장: “저는 한 분야에서 1~2% 안에 들어가는 사람은 강도라도 존경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선친이 수집한 달 항아리가 놓인 회장실을 보여준 뒤) “부친 3주기가 지나면 이 방을 제 스타일로 바꿀 겁니다. 그때 박 화백 그림을 걸 겁니다.”
그렇게 그는 이건희 회장 집무실에 작품이 걸리는 한국화가가 됐다.
독학파라는 점은 이렇게 운을 불러왔지만 개인사적인 아픔이 있다. 박 화백은 경북 청도 운문면에서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유복한 집안 출신이었지만, 중학교만 겨우 졸업했다. 영남의 알프스라는 운문산은 현대사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 운문산에 암거하던 빨치산에 의해 마을 주민 10여명이 무참히 죽임을 당했다. 한의사였던 그의 아버지도 그때 험한 일을 당했다. 어머니를 잃은 뒤라 아버지 등에 업혀 울던 그도 한쪽 팔을 잃었다. 만 3세 때 일이다. 집성촌인지라 초등학교는 그럭저럭 다녔다. 하지만 낯선 동네 3곳을 지나야 나오는 중학교는 또래들이 놀리는 통에 다니다 말았다. 졸업장만 겨우 받았다.
스스로 세상으로부터 격리해 살던 그에게 유일한 낙은 그림이었다. 제삿날이면 병풍 그림을 보고 따라 그리던 여섯 살 막내를 보고 아버지처럼 의지하던 맏형이 친척들에게 말했다. “야가, 대성이가 그림에 소질이 있어요.”
일본서 공부하고 와서 신식 문화를 접한 맏형은 낙서한다고 혼내기는커녕 칭찬하고 자랑했던 것이다. 화가로서 운명은 그때 결정된 것이라고 박 화백은 웃으며 회고했다. 입시도 포기하고 들판에 나가 스케치하며 그림을 그렸다. “내가 사는 동네를 벗어나는 건 죽는 거나 마찬가지였다”는 그였지만, 18세 되던 해 맏형이 논을 팔아 독일제 의수(義手)를 구해준 이후 세상으로 나갔다. 부산의 서정묵, 서울의 이영찬 박노수 등 당대 유명 서화가로부터 그림을 배웠다.
21세이던 66년 동아대 주최 국제미술대전에서 입선했다. 지역 신문에 이름 석 자가 실리는 기쁨을 맛봤다. 화가로 살 수 있는 길이 있음을 그제야 알았다. 이듬해부터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 공모해 내리 8차례 입선했다. 그런 경력을 바탕 삼아 73년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대만 고궁박물관 초청을 받아 6개월간 체류하면서 중국 미술사의 걸작을 실견하고 임모(전통 회화의 학습법으로 따라 그리는 것)하는 기회를 얻었다. 그때 중국 전통회화의 스케일과 사실성에 놀랐다. 원나라 때 황제의 행차를 그린 ‘출경도’는 길이가 26m였고 얼마나 사실감이 있는지 영화처럼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도 대작을 그리기 시작했다. 한국화로는 드물게 4m짜리 그림도 있다. 그때부터 현장 사생을 중시하며 전국을 누볐다. 특히 설악산에 오래 칩거했다. 흙산이 아니라 깎아지른 기암괴석의 산을 표현하다 보니 자연 붓질이 호방해졌다.
이렇게 전국 명승을 돌며 사생한 대작들을 호암갤러리 전시에 내놨다. 이때 작품들도 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됐는데 이 중 작품 3점이 수묵의 고장인 전남도립미술관에 기증돼 지난해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에서 일반에 공개됐다. 국립현대미술관에도 일부 기증된 것으로 전해진다.
박 화백은 전통을 추종하지 않고 자기식으로 현대화한다. 미점준이니 하는 준법에서 벗어나 있다. 작품 ‘서귀포’에서 보듯이 묵과 색을 자유자재로 쓰며 서양화의 수채화와 전통 묵화의 경계를 허문다. 그대로 닮게 그린 게 아니라 내면을 표출한 심상의 풍경이다. ‘일출봉’에선 가로로 북북 그은 몇 번의 붓질과 물감의 농담만으로 산과 파도가 지닌 시간의 무게를 표현해낸다. 실경을 그리면서도 돌과 나무에 마음을 의탁하던 문인화적인 해석을 가하던 겸재 정선의 피가 흐른다.
이건희 회장에게는 또 다른 고마움이 있다. 원하는 걸 말해보라기에 안될 줄 알면서도 중국을 가보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당시는 중국과 수교 전이었다. 삼성 홍콩 지사를 통해 수입상 신분을 가장해 중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 청조 말에 태어나 문화혁명을 거치며 뼈를 깎는 자기혁신을 통해 전통 회화를 혁신한 이가염(1907-1989)을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이가염은 ‘먹(수묵)을 중시하라, 그리고 서예를 중시하라’는 두 가지 가르침을 줬다.
이후 박대성은 서예를 공부했고 상형문자의 원형을 찾아 히말라야를 다녀왔다. 서구 추상화의 본산인 뉴욕이 궁금해 미국도 다녀왔다. 역마살 낀 사람처럼 전국을 주유하며 그림을 그리던 그는 99년부터 경주에 화실을 마련해 작업하고 있다. 경주의 솔거미술관은 애초 그의 이름을 딴 미술관으로 출발하려 했다.
2000년 이후 작품들은 더욱 파격적으로 됐다. 원근법을 무시하고 여러 시점을 한 화면에 구사한다. 새처럼 내려다보는 시선과 아래서 아득하게 절벽 꼭대기를 올려다보는 시선이 한 화면에서 소용돌이치는 ‘현율’(2006)이 대표적이다. 이는 정선 그림에도 없는 기법이다.
박대성의 작품은 한국화의 독창성을 찾는 해외 큐레이터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오는 6월 카자흐스탄 국립미술관 개인전을 시작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LACMA), 하버드대학교한국학센터미술관, 다트머스대 후드미술관 등에서 개인전이 열린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