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이 피어나는 4월의 하늘 아래서 나는 외로웠습니다. 예수라는 분에게 인생을 걸어도 좋겠다는 생각에 신학교에 입학했지만, 선지 동산이라 일컬어지는 신학교는 내게 낯선 곳이었습니다. 모두가 당연하게 알고 있는 정답을 나 홀로 모르는 것 같은 어지러움이 심했습니다. 느낌표들이 모인 자리에 홀로 물음표로 선 것 같은 아뜩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좁기는 하지만 캠퍼스에 넘치는 짐벙진 기운이 나와는 무관한 것 같았습니다. 허릅숭이의 어투로 벗들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기도 했습니다. 진리는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기만 했습니다.
어느 날 채플을 빼먹고 거리를 배회하다가 학교 앞 서점에 들렀습니다. 서가에 꽂힌 책을 일람하다가 마치 쇠붙이가 자석에 이끌리듯 책 한 권을 뽑아 들었습니다. ‘아웃사이더’ 그 제목을 보는 순간 나를 사로잡고 있던 감정의 정체를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책날개를 펼쳐 저자에 대한 소개 글을 읽었습니다. 콜린 윌슨, 스물네 살에 그 책을 써서 세계적인 비평가의 반열에 섰다는 말을 읽는 순간 벼락을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는 겨우 이제 광활한 사유의 세계에 입문하려고 서성이고 있는데, 나와 동년배와 다를 바 없는 그가 독학으로 그런 독창적인 사유의 지평을 펼쳤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책을 읽는 동안 세상이 두 겹의 질서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확연히 깨달았습니다. 사람들이 만나 함께 일하고 사귀는 공적 영역에 잘 적응하며 사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주류 세계와 불화를 거듭하면서 생의 심연에 끌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김수영 시인은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라는 시에서 “아무래도 나는 비켜 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 서 있다”고 노래했습니다. 그 시를 읽으며 마치 내 속내를 들킨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조금 비켜선 자리를 좋아하던 나는 스스로 ‘아웃사이더’를 자처하기 시작했습니다. 앙리 바르뷔스, 장 폴 사르트르, 알베르 카뮈, 프란츠 카프카,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빈센트 반 고흐, TS 엘리엇, 헤르만 헤세, 프리드리히 니체의 세계를 서성이며 고통 무의미 공허의 인력에 끌려 들어가기도 하고 때로는 저항하기도 했습니다. 심연을 응시하면서도 심연에 속절없이 끌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가끔 고개를 들어야 했고, 고개를 든 자리에는 언제나 예수가 있었습니다.
‘아웃사이더’를 다 읽고 한 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콜린 윌슨이 그 책에서 언급한 책은 구할 수 있는 한 다 구해 읽겠다는 결심이었습니다. 신학교 시절, 신학책보다 문학책을 붙들고 살았으니 성실한 신학생이라 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탈 덕분에 조금은 자유롭게 세상과 인간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삶은 복잡하고 모호하기 이를 데 없음을 알기에 어려움에 부닥친 이들에게 함부로 이게 정답이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다만 그의 회의와 방황이 무가치한 것이 아님을 일깨워주려고 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