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울린 한국계 작가의 엄마 이야기

입력 2022-03-03 17:55
‘H마트에서 울다’를 쓴 한국계 미국인 작가 미셸 다우너. 2018년 ‘뉴요커’에 기고한 동명의 에세이가 주목을 받으며 책 출간으로 이어졌고, 이 책이 지난해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다. 한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다우너는 뮤지션이기도 하다. 지난해 발표한 그의 세 번째 앨범은 그래미상 후보에 올랐다. Helene Tchen 제공

한국계 미국인 미셸 자우너(Michelle Zauner·33)의 자전적 에세이 ‘H마트에서 울다’(Crying in H Mart)가 번역돼 나왔다. 2018년 미국 문학잡지 ‘뉴요커’에 실려 호평을 받은 동명의 에세이를 바탕으로 쓴 책이다. 지난해 미국에서 출간돼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한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를 둔 자우너는 뮤지션이자 작가다. 서울에서 태어나 생후 9개월 만에 미국으로 이주했고 오리건주 시골 마을에서 자랐다. 대학 시절 친구들과 밴드 ‘재패니스 브렉퍼스트’(Japanese Breakfast)를 결성해 보컬이자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며 지금까지 세 장의 음반을 발표했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나는 H마트에만 가면 운다.”


책은 이 문장으로 시작된다. H마트는 미국에 있는 한국식 슈퍼마켓이다. 거기에 가면 한국 식재료를 살 수 있고 식당가에서 비빔밥이나 떡국 같은 한국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작가는 엄마가 죽은 후에도 H마트에 종종 간다. 거기서 엄마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린다.

한국 음식은 그를 어머니와 접속시키는 주요 매개체다. 작가는 반찬 코너에서 엄마의 계란장조림과 동치미 맛을 떠올리며 눈물을 훔치고, 엄마와 둘이서 식탁에 앉아 만두를 빚으며 보낸 시간을 떠올리면서 만두피 한 덩이를 집어 든다. 식당가에서 비빔밥을 먹는 자녀에게 잔소리를 하는 여성을 볼 때, 갈비탕 속에 있는 고기를 건져 아들의 숟가락에 얹어주는 여성을 볼 때 엄마를 떠올린다.

“좀 피곤해 보이는 아들은 어머니에게 별로 말도 건네지 않고 조용히 앉아서 먹기만 한다. 그에게 내가 지금 얼마나 어머니를 그리워하는지 아느냐고 말해주고 싶다. 어머니한테 더 잘 대해드리라고, 삶은 허망해 어머니가 언제 훌쩍 떠나가 버릴지 알 수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작가의 어머니는 50대 후반에 갑작스럽게 암을 선고받고 투병하다가 2014년 10월 눈을 감았다. 책은 반항적인 예술가인 딸이 엄마의 투병 과정을 함께하며 보낸 시간을 서술한다. 미국인으로 자라난 그에게 지나치게 간섭적인 한국식 엄마는 종종 이해하기 어려웠다. 엄마의 암을 계기로 딸은 엄마의 세계 속으로 깊게 들어간다. 지극히 한국적인 세계, 그리고 자신의 절반을 만든 세계. 딸은 마침내 “나는 엄마의 유산이었다”고 선언하게 된다.

자우너의 공연 모습. Joe Justice 제공

“‘괜찮아, 괜찮아.’ 엄마가 말했다. 내게 너무도 익숙한 한국말. 내가 평생 들어온 그 다정한 속삭임. 어떤 아픔도 결국은 다 지나갈 거라고 내게 장담하는 말. 엄마는 죽어가면서도 나를 위로했다.”

이 책은 애절한 상실의 기록에 그치지 않는다. 엄마와 정체성, 음식, 추억, 가족에 대한 이야기로 넓게 펼쳐진다. 특히 상실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야말로 이 책의 주제라고 할 수 있겠다.

엄마의 죽음은 작가에게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을 잃었다는 슬픔 이상이다. 백인 아버지를 둔 그에게 어머니의 상실은 자신의 정체성의 절반을 이루는 한국인이라는 감각의 위기다. 그가 한국인임을 확인시켜줄 사람이 더는 없는 것이다. 작가는 H마트 건조식품 코너에서 훌쩍이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제 전화를 걸어, 우리가 사먹던 김이 어디 거였냐고 물어볼 사람도 없는데, 내가 여전히 한국인이긴 할까.”

그가 H마트에 가는 것은 “어머니는 사라졌어도 내 정체성의 절반인 한국인이 죽어버린 건 아니라는 증거를 찾으려는 것”이다. 유튜브를 보면서 된장찌개와 잣죽을 직접 만드는 것은 “한때 내 안에 깊숙이 새겨져 있다고 느낀 문화가 이제 위협받는 기분이 들어 그것을 보존하려는 노력”이다.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거대한 슬픔, 어머니라는 존재에 뿌리 박은 자기 정체성의 위기 속에서 작가는 무너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자우너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다고 해도 그와의 기억까지 잃어버려선 안 된다고 말한다. 작가는 상실 이후에도 길게 이어지는 고통의 시간을 추억의 힘으로 이겨나가고 그를 통해 단단하고 성숙하게 변해간다.

“내 기억을 곪아 터지게 놔둘 수는 없었다. 트라우마가 내 기억에 스며들어 그것을 망쳐버리고 쓸모없게 만들도록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 기억은 내가 잘 돌봐야 하는 순간이었다. 우리가 공유한 문화는 내 심장 속에, 내 유전자 속에 펄떡펄떡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나는 그걸 잘 붙들고 키워 내 안에서 죽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했다.”

작가는 책에서 김치의 발효 과정을 묘사한다. “배추는 놔두면 곰팡이가 피고 부패한다. 썩어 못 먹게 된다. 하지만 배추를 소금에 절여두면 부패 과정이 완전히 달라진다. 설탕이 분해되면서 젖산을 만들어내 배추가 썩지 않게 되고, 그 과정에서 탄산가스가 나와 절임이 산성화된다. 그렇게 해서 시간이 지날수록 색과 질감이 변하고, 톡 쏘는 새콤달콤한 맛이 나게 된다.”

시간은 배추를 부패시키듯 추억도 부패시킨다. 그러나 부패에 맞서 발효가 가능하다. ‘기억의 발효’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것이야말로 자우너의 음악과 글에서 핵심을 이룬다. 자우너는 어머니의 상실과 애도를 자신의 예술적 주제로 삼았다. 배추를 발효시켜 김치를 만들 듯 추억을 발효시켜 예술을 만든 것이다. 그는 2016년 엄마를 추억하는 노래를 담은 첫 앨범 ‘저승사자’(Psychopomp)를 발표했다. 엄마의 20대 시절 사진을 이 앨범 표지에 사용했다. 지난해 나온 그의 세 번째 앨범 ‘주빌리’(Jubilee)는 2021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두 부문 후보에 올랐다.

자우너의 작가적 가능성을 입증한 것도 어머니 얘기를 쓴 이 책이었다. 그는 “엄마께 이 책을 바친다”고 썼다. 자우너는 이 책을 통해 미국 문학계가 주목하는 한국계 작가 대열에 합류했다. 이민진, 캐시 박 홍, 스태프 차 등 근래 미국 출판계에선 한국계 이민자 자녀들의 활약이 눈부시다.

‘H마트에서 울다’는 한국어를 몇 마디 못 하는 작가, 더구나 30대 초반의 젊은 작가가 썼다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한국적인 정서가 진하게 깔려 있다. 한국 음식에 대한 세세한 설명은 물론이고 고스톱, 노래방, 불가마 등 한국 문화가 무수히 나온다. 영화 ‘미나리’에서도 확인한 것처럼 외국에 사는 한국계 예술가들이 한국적 이야기를 매우 깊으면서도 보편적인 방식으로 보여주곤 한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다.

잊지 않는다는 것은 물론 어려운 일이다. 죽은 엄마의 물건은 정리되고 함께 살던 집도 처분된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엄마를 만날 수 있다. H마트에 가고, 김치 담그는 법을 배우고, 엄마와 함께 가려던 여행지에 가면서. “너한테서 항상 김치 냄새가 날 거야. 그 냄새가 네 땀구멍으로 배어 나올 테니까.” 엄마는 세상을 떠나면서 나라는 유산을 남겨놓았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