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포기하지 않는, 정신력 강한 선수로 기억되고 싶어요”

입력 2022-03-05 04:08
한국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 김보름이 지난달 28일 서울 송파구의 소속사 사무실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하다 자신의 스케이트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권현구 기자

지난달 19일 중국 베이징 국립 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 두 번 다시 없을지 모를 올림픽 무대에 4년 만에 돌아온 김보름(29)은 그 어떤 시합보다도 마음이 편하고 기분이 좋았다. 경기에 집중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잘하고 싶다, 꼭 좋은 모습 보여드리고 싶다, 그는 되뇌었다.

김보름은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여자 매스스타트 결승에서 8분16초81를 기록하며 5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4년 전 평창올림픽 은메달리스트로서 아쉬움보다는 ‘고통의 시간’을 이겨낸 후련함이 더 컸다. 지난달 28일 서울 송파구의 소속사 사무실에서 만난 김보름은 “이번 올림픽은 기억에 두고두고 남을 올림픽이 될 것 같아요. 너무 좋았던 기억들만 갖고 왔어요”라고 말했다.

김보름(가운데)이 지난달 19일 중국 베이징 국립 스피드스케이트 경기장에서 열린 2022 베이징올림픽 여자 매스스타트 결승에서 질주하는 모습. 권현구 기자

김보름은 평창올림픽 당시 ‘왕따 주행’ 논란에 휘말렸다. 여자 팀추월 네덜란드와 8강전에서 노선영만 뒤처진 채 김보름 박지우가 빠르게 결승선을 통과했고, 당시 한 방송사 중계진은 “절대 나와서는 안 되는 장면이 나왔다”고 지적했다. 경기 후 방송 인터뷰에서 김보름이 입꼬리를 올리며 살짝 웃는 모습을 보이자 국민적 비난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원래 밝고 잘 웃는 성격이었다고 했다. “활발하고 뛰어놀길 좋아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지금은 좀 가만히 있는 걸 좋아하고 많이 차분해진 거 같아요. 평창 이후에 성격이 많이 바뀌었어요. 이게(차분함) 좀 심해졌어요.”

올림픽이 지난 뒤 문화체육관광부는 특정감사에서 ‘왕따 주행’은 없었다고 결론 내렸다. 김보름이 노선영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도 1심은 지난달 16일 “왕따 주행은 없었다”며 “당시 경기는 정상적인 주행이었고, 오히려 선수들의 컨디션에 따라 주행순서를 결정하고 선수 간의 간격이 벌어질 때 적절한 조치를 취할 지도력의 부재 등에 따른 결과로 보인다”고 판시했다.

김보름이 2018년 2월 24일 강원도 강릉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에서 열린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여자 매스스타트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뒤 관중석을 향해 눈물을 흘리며 큰절을 하는 모습. 김보름은 당시 팀추월 경기에서 ‘왕따 주행’ 논란에 휘말렸으나 문화체육관광부는 특정감사를 통해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국민일보DB

하지만 당시 김보름은 매스스타트에서 은메달을 따고도 빙판에 엎드린 채 눈물을 흘리며 사과했다.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의 감정은 정말…. 넋이 나간 상태에서 며칠을 보냈어요. 그러다가 그 경기를 했고 모든 게 정상적인 삶, 정상적인 생활이 아니었어요. 정말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큰절을 했던 거 같아요.”

스케이트를 포기할까 고민했다. 실제로 6개월여간 운동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스케이트를 너무 좋아했고, 좋아하는 스케이트를 계속 타려면 거짓을 바로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김보름은 일부 승소한 1심 판결 결과에 “잘못 알려진 부분이 많아서 ‘이제야 좀 진실들이 알려지는구나’ 생각했어요. 정신적 피해가 인정되지 않아서 아쉽긴 해도 제가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금액이 중요한 건 아닌 거 같아요”라고 했다.

김보름은 소셜미디어에 ‘인생은 기다림의 미학’이라고 쓴 적이 있다. “여러 가지 감정이 있었던 거 같아요. 언젠가는 잘못 알려진 것들이 바로 잡힐 시기가 올 거로 생각했어요.”

그는 평창올림픽 이후 4년을 ‘고통’으로 표현했다. “슬픔이나 화남 같은 단어보다 고통이라는 단어가 맞는 것 같아요. 너무 긴 시간이었어요. 즐겁고 좋으면 시간이 빨리 가잖아요. 고통스럽고 힘든 시간이어서 지난 4년은 너무나도 길었어요.”

온전히 운동에 집중하기도 어려웠다. 공황장애 등 정신적 충격에 따라 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다녀야 했고 재판도 받아야 했다. 이번 베이징올림픽 경기 당일에도 정신과 치료약을 3알 복용했다. “그때(평창올림픽)는 더 먹었었어요. 아무래도 운동을 계속 해야 하다 보니까. 조금씩 줄여가려고 노력했는데 아직 끊지는 못했어요.”

고통으로 응축된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건 주변의 지지자들이었다. 가족이 버팀목이 됐다. 어머니는 심리치료까지 함께 받았다. 그는 “딸로서 부모님이 힘들어하시면 마음이 아프잖아요. 괜히 저 때문에 힘들어하시는 거 아닐지 걱정도 됐어요. 하지만 같이 웃고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힘이 많이 됐고 잘 버텨낼 수 있었어요.”

비난이 쏟아질 때마다 그를 지켜준 팬들도 있었다. 국내 경기뿐만 아니라 가까운 일본에서 경기할 때도 4년 내내 경기장을 찾아와 김보름을 응원했다.

최근 판결이 알려지면서 여론은 급변했다. ‘아무도 응원을 안 해주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던 베이징올림픽에선 수많은 응원이 이어졌다. 김보름은 자신을 향한 격려와 사과로 그간의 상처를 치유하고 있다.

“응원 메시지가 많이 와서 일부러 많이 읽어보려 했어요. (올림픽 전에도) 최대한 하나하나 읽었어요. 읽으면서 너무 많이 힘이 됐고 좋았어요.”

표창원 전 의원(범죄과학연구소 소장)도 평창올림픽 때 김보름에 대해 언급한 트윗을 공유하며 “사과드린다. 잃어버린 세월을 되돌릴 순 없겠지만 많은 격려와 응원으로 긍지와 자부심, 마음의 평온을 되찾길 바란다”고 고개 숙였다. 김보름은 “오히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좋았어요. 더 힘이 나기도 했고요”라고 화답했다.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김보름은 선수로서 전성기를 보내고 있었다. 당시 여자 매스스타트 세계랭킹 1위였고, 어릴 적 꿈인 ‘금메달’도 곧 손에 닿을 듯했다. 하지만 논란의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당연히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전성기 나이는 그때가 맞긴 하죠. 아쉽다는 생각을 안 했다면 거짓말이죠, 저도 사람이니까. 운동을 시작할 때 목표가 금메달이었고 평창올림픽 전에 가장 좋은 성적을 냈고 자국 올림픽이기도 했고요. 그 나이대 그 기량에 딱 맞게 올림픽이 있었는데…. 그래도 그 상황에 맞게 최선을 다해서 은메달도 너무 감사하게 생각해요.”

전환점이 된 베이징올림픽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평창 끝나고 운동을 그만둘까 생각했고, 실제 6개월 넘게 운동을 못했어요. 그러다 다시 스케이트를 타게 됐고 베이징에도 나갔어요. 한 해 한 해를 보내다 보면 금방 다음 올림픽이 올 것 같아요. 그러면 또 기회가 올 수 있지 않을까요.”

김보름은 이제 ‘왕따 주행 논란’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기억되길 바랐다.

“저는 운동선수니까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 선수’ ‘멘탈(정신력)이 강한 선수’ 그냥 이렇게 기억에 남고 싶어요.”

권중혁 기자 gre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