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코미디

입력 2022-03-05 04:08

우람한 몸집의 교직원이 역사 수업 중인 교실로 들어가 학생들을 밖으로 내보낸다. “모두 밖으로 나가거라.” 역사 교사가 교직원에게 따져 묻는다. “무슨 일이야. 수업 중이잖아.” 교사의 시선을 피하던 교직원은 마지못해 답한다. “위에서 내려온 지시야.”

교사가 되묻는다. “이해할 수가 없네. 우리 반 학생들만 나가는 이유가 뭐야. 옆 반 학생들은 그대로 있잖아.” 교직원은 타이르듯 답한다. “옆 반에선 지금 수학 수업 중이야.” 그 말이 교사의 가장 아픈 곳을 찔렀다. “우리 반 학생들은 역사를 배우고 있었어.”

교사의 언짢은 표정을 교직원은 비웃음으로 되받는다. “어디 비교할 과목을 비교해야지.” 역사 수업을 무시하는 건 교직원만이 아니었다. 교사는 교편을 내려놓기로 마음먹었다. “지긋지긋하군. 더는 못 해 먹겠어.” 짐을 꾸리는 교사를 교직원이 말린다. “그러지 마. 함께 술이나 마시자고.” 교사는 교직원을 뿌리치고 열변을 토한다.

“수학은 과학이지. 역사는 쓰레기야. 다들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렇게 말해. ‘정치인은 왜 집권하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느냐’고. 정치인은 학생들처럼 수학만 배웠어. 아는 것이라곤 붙여놓고 떼어놓는(더하고 나누는) 것뿐이거든. 우리는 25년간 망할 녀석 둘을 놓고 하나를 선택해 왔어. 그러고는 이렇게 말하지. ‘내가 잘못 골랐지만 다른 한 명보단 나았다’고. 둘 다 이름만 다를 뿐 한통속인데 말이야. 나에게 집권할 기회가 있다면 정치인들, 또 그들의 특권을 없애버리겠어.”

교사의 욕설 섞인 열변을 다른 교실에서 숨어 지켜보던 한 학생이 그 순간을 스마트폰으로 찍어 유튜브에 올렸다. 영상은 국민적 관심을 끌었고, 대권 주자로 새 인물을 물색하던 한 정당에 포착됐다. 교사는 집으로 찾아온 정당 관계자들의 제안을 수락해 대선에 도전했고, 당선됐다. 교사는 이제 국가 최고 권력자로서 기성 정치의 부패와 무능에 맞선다.

지금까지 서술한 이야기는 2015년 10월부터 2019년 3월까지 우크라이나 방송사 ‘오딘 플리우스 오딘(1+1)’에서 방송된 정치 풍자 시트콤 ‘국민의 종’ 첫 회의 한 장면이다. 이 시트콤은 국내 케이블채널에서 의역된 ‘국민의 일꾼’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

극중 주인공은 역사 교사 출신 대통령 바실 홀로보로디코. 이 역할을 맡은 배우는 지금 러시아군에 결사항전 중인 우크라이나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다. 시트콤은 대통령 집권 중 벌어지는 해프닝을 그려내는 식으로 전개된다. 앞서 서술한 장면은 대권 도전의 시작을 보여주는 3분 분량의 도입부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장면이 3년6개월간 51부작으로 이어진 시트콤 전체를 관통하며 홀로보로디코의 투쟁기를 비장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가상의 대통령을 국민 상당수가 응원했다. ‘국민의 종’은 인구 4300만명인 우크라이나에서 2000만명가량을 TV 앞에 불러 앉혔다. 지금은 우크라이나의 적대국인 러시아, 벨라루스에서도 방영됐다. 젤렌스키는 그 인기를 등에 업고 2017년 시트콤 제목과 같은 이름의 정당을 창당했고, 2019년 대선에 도전했다. 결과는 압승. 후보 39명을 2명으로 압축한 결선투표에서 득표율 73.22%의 압도적 지지를 얻었다.

정치 경험이 전무한 젤렌스키의 3년 전 대선 승리를 놓고 ‘극단주의자들 틈에서 코미디언 말고는 찍을 후보가 없었다’는 뒷말도 나온다. 하지만 결선투표의 마지막 경쟁자였던 당시 대통령 페트로 포로셴코는 이념적 극단성으로 국민을 오도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를 향한 여러 비판 뒤에는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유럽의 연대를 호소했고 친러·반러로 나뉜 우크라이나 동·서부를 통합하기 위한 노력도 있었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을 계기로 봉기한 친러 분리주의 반군과 정부군의 끝없는 교전에서 포로셴코의 지지율은 꾸준하게 하락했다. 젤렌스키의 당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원인으로 꼽힌다. 우크라이나가 3년 전 택한 대통령은 코미디언이었지만, 당시 그들에게 놓였던 상황은 코미디가 아니었다.

“초보 정치인이 러시아를 자극했다”며 전쟁 피해국에 책임을 돌리고, 생사의 갈림길에 선 우크라이나 국민을 응원한다고 과일에 낙서를 그려 SNS에 올리는 후보들이 유력 대권 주자인 우리 선거판이야말로 코미디에 가깝다. 그 부끄러운 말과 행동이 우리에게 되돌아오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김철오 온라인뉴스부 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