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극한직업인 듯 아닌 듯

입력 2022-03-03 03:03

극한직업이란 무엇인가. 일이 극도로 고되고 힘든 직업인가. 연봉의 많고 적음을 떠나 위험한 일을 하는 직업인가. 아니면 많은 사람이 꺼리는 일을 하는 직업인가. 예를 들면 해외에서는 동물 사체를 처리하는 일을 극한직업으로 꼽곤 하는데, 그 이유는 노동의 강도보다는 심리적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이처럼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극한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사회가 돌아갈 수 있다.

특정 직업군이 가지는 위험도나 스트레스 정도는 시대가 바뀌며 변하는 것 같다. 일례로 한국사회에서 교사는 예부터 존경받는 선망의 직업이었다. 그런데 2010년대 중반 교사를 위해 고안된 보험이 탄생했다. 교권이 침해될 때 민·형사 소송비를 지원하고, 교사 업무 중 배상책임을 보장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상품이다. 하지만 교육 활동의 필요에 전적으로 맞춰 설계한 상품이 나올 정도면, 교사가 일반적 의미에서 극한직업이라고 하기는 힘들 것 같다.

그런데 필자의 경우는 강단에 선 기간이 길어질수록 가르치는 일이 더 극한직업처럼 느껴진다. 그 어려움은 노동 강도나 위험성이 아니라 교육의 힘 자체에서 나오는 것 같다. 내 생각이 타인의 생각을 형성하고, 내 말이 학생들의 미래에 영향을 끼칠 수 있기에, 교실에 들어설 때마다 어느 정도의 ‘두려움과 떨림’이 늘 있다.

올해 개강을 앞두고는 수업 부담이 더 크게 느껴진다. 팬데믹 상황이 계속되고 빈부격차는 벌어지고, 이 와중에 전쟁은 일어나고 사회적 갈등이 고조되고 삶의 형태가 급격히 바뀌었다. 변화한 현실을 이해하려면 공부를 착실히 해야 하는데, 늘 준비가 부족한 채 수업에 들어간다. 그러다 보니 내게 친숙한 기존 정보나 세계관과 가치에 함몰되어, 나의 작은 세계 속에 학생들의 가능성을 가둬두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학생들이 교수의 실체를 파악할 만할 때 학교를 졸업한다는 사실이다.

인류의 오랜 역사 속에 다양한 유형의 스승이 존재했다. 심지어 신약성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선생’이라는 호칭을 부여한다. 예부터 신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심으로써 인간의 고통을 대신하셨다고 말했는데, 그 괴로움 속에 교육 현장의 곤란도 포함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도 해본다. 성경을 보면 제자들이 스승을 잘 이해 못 했고, 때론 반항도 했고 막판에는 배신까지 했다. 당시 교수평가 제도가 있었다면, 생전의 예수께서는 그리 높은 점수를 받으실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가르침이 진실할 뿐만 아니라 삶과 하나였기에, 그분은 인류의 참 스승이라고 불러왔다. 반면 현실의 모든 교사는 불완전한 교육 내용을 전달할 수밖에 없고, 정도의 차이만 있지 누구나 언행 불일치의 문제를 겪고 있다. 인간으로서 한계와 부족함을 볼수록 가르치는 일이 극한직업은커녕 ‘불가능한 직업’처럼 느껴진다. 그런데도 교육을 통해 완벽하지는 않아도 참된 배움이 일어나기에 인류는 지금과 같이 발전된 모습으로 살고 있고, 수많은 도전에 창조적으로 반응할 수 있었다. 이런 모순을 마주한 고대의 신학자들은 앎을 신비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신비는 참 스승이신 그리스도께서 ‘내적 교사’로 우리를 은밀히 가르치시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믿었다.

학생 시절에는 내적 교사로서 그리스도를 단지 고대인이 만든 신학적 개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매해 교원 호봉이 오를수록 나 자신이 아니라 모든 사람 안에서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배움을 일으키는 참 스승에게 희망을 걸 수밖에 없음을 체감한다. 유독 혼란스러운 3월 초, 가르침과 배움의 장소에 있는 모든 이가 이 놀라운 신비를 풍성히 경험하는 유익한 한 학기를 맞이하기 바란다.

김진혁 교수(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