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의 헌책방] 집 나간 개그 코드를 찾습니다!

입력 2022-03-05 04:04

나는 남을 잘 웃길 줄 모르는 사람이다. 프랑스 작가 에밀 졸라는 소설 ‘목로주점’ ‘나나’ 등이 속한 ‘루공-마카르 총서’를 통해 인간의 운명은 자라난 환경과 유전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고 말했다. 과연 그런가? 내 아버지를 떠올려 보니 당신 역시 웃는 모습을 거의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서재에는 책이 많아서 나는 어릴 때 늘 책을 구경하며 놀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상한 책을 발견했다. 문고본 크기의 얇은 책이었다. 제목은 ‘한국인의 유모어’인가 그랬다. 개그를 모은 책이다. 아버지는 이런 책을 보면서 개그를 연습했던 것인가? 책 뒤쪽을 확인해 보니 엄청 오래전에 출판된 거였다. 그러니 내용도 한물간 우스개만 가득할 수밖에. 최신 개그를 연습해도 시원찮을 판에 분명히 헌책방에서 샀을 것 같은 이런 구식 개그책이라니! 아무래도 나의 이 재미없는 성향은 유전인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로부터 수십년이 지난 다음,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헌책방 주인장이 돼 일하게 됐다. 헌책방이 구식이라는 선입견을 깨기 위해 나는 가게 곳곳에 재미있는 장식품과 그림을 걸어놓았다. 그러나 내 생각과 달리 손님들은 그걸 보고 웃거나 재밌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아아, 나의 개그는 이대로 가출해버리고 만 것인가?

책방을 시작하고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한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껄껄 웃었다. 영문도 모른 채 나도 웃었다. 우리 책방은 오후 3시에 문을 여는데, 그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에 “오후 3시는 어정쩡한 시간”이라는 문장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 문장을 책방 입구 벽에 써놨다. 손님은 그걸 보고 웃음이 터진 것이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그 손님은 나의 개그 코드를 이해해 준 첫 번째 방문자였다.

그는 자기도 책 읽기를 좋아한다면서 ‘구토’와 헌책방을 오후 3시로 연결한 나의 유머 감각을 극찬했다. 그러면서 몇 해 전 유럽으로 출장 다녀온 이야기를 꺼냈다. “시내에 유명한 커피숍이 있는 데 가게 이름이 ‘에이허브’더라고요. 그곳 커피는 쓰지 않고 짠맛이 날 것 같았단 말이죠” 하면서 숨이 넘어갈 듯 웃었다. 하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도대체 그 얘기 어느 부분에 웃음 포인트가 있는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알고 보니 ‘에이허브’는 소설 ‘모비 딕’에 나오는 포경선 선장 이름이라 커피 맛도 짜지 않겠냐는 게 요지였다. 그 소설의 일등 항해사 ‘스타벅’의 이름을 빌린 커피숍은 아는데 설마 선장 이름의 커피숍이 있을 줄이야. 손님이 앞에 있으니 나도 보조를 맞춰 웃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다지 재미있는 개그는 아니었다.

이 일을 겪은 후 억지로 다른 사람을 웃겨야겠다는 강박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나는 헌책방 주인이지 개그맨이 아니니까. 그래도 때때로 아쉬움이 생긴다. 책을 파는 것도 좋지만, 가게에 온 손님들이 잠시라도 웃고 가실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오늘도 내 나름의 개그를 연습한다. 오후 3시의 헌책방은 앞으로도 계속 즐거운 일을 만들고 싶다.

윤성근 이상한나라의헌책방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