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면전에 돌입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주요 자금줄로 암호화폐(가상화폐)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러시아는 미국 주도의 금융제재를 무력화하기 위해, 우크라이나는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러시아의 돈줄을 옥죄기 위해 러시아의 암호화폐 시장만 정밀타격할 제재 방안을 고심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지난달 26일(현지시간) 공식 트위터에 “우크라이나 국민을 지지해 주십시오. 이제 암호화폐를 기부받습니다”라며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USDT(테더)를 전송받을 지갑 주소를 공유했다.
블록체인 분석 기업 일립틱에 따르면 해당 주소로 500만 달러(약 60억원)가 넘는 기부금이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모였다. 우크라이나 내 비정부기구(NGO)와 자원봉사단체에도 4000건 이상의 암호화폐 기부가 이어졌다. 우크라이나의 기존 금융 시스템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투명하고 안전한 암호화폐가 기부에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는 셈이다. 블룸버그통신은 “적십자 등 대형 자선단체로 제한돼있던 기부 방식에 (코인이) 더 많은 옵션을 제공했다”고 평했다.
코인 업계의 큰손들도 우크라이나 지지 의사를 표명하며 기부에 동참했다. 글로벌 가상자산 거래소 FTX 창업자 샘 뱅크만 프라이드는 최근 “우크라이나의 FTX 이용자들에게 25달러씩 지급했다”고 밝혔다. 이더리움의 창시자 비탈릭 부테린은 자신의 트위터에 우크라이나 시민을 돕는 펀딩 게시물을 적극 공유하고 있다.
러시아 역시 암호화폐를 전쟁 자금줄로 이용하려 들고 있다. 뉴욕타임스(NYT)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는 지난 2014년 크림반도 병합사태 당시 미국의 금융제재를 경험한 뒤부터 암호화폐 경제를 키워왔다. 금융기관과 주요 인물을 제재 명단에 올리고 국제금융거래 시장에서 퇴출하는 미국의 기존 금융제재 전략을 무력화하려는 시도다.
러시아 국민들이 형성한 암호화폐 시장 규모도 막대하다. 러시아 금융시스템에 대한 내부 불신이 확산하며 최근 몇 년간 러시아 국민들의 암호화폐 보유량은 급속도로 증가해왔다. 이날 기준 1200만개 이상의 러시아 암호화폐 지갑이 활성화돼있으며 총 수신 잔액은 239억달러(약 28조8000억원)에 달한다.
이에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암호화폐 시장에 대한 제재를 검토 중이다. 러시아 국영은행 등 금융기관 90여곳을 제재하고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망에서 러시아를 퇴출하는 등 조치에 이어 이번엔 암호화폐 돈줄까지 막으려는 것이다.
문제는 미국이 러시아 암호화폐에 대한 제재에 성공할 경우 암호화폐 시장의 신뢰성에 금이 갈 수 있다는 점이다. 당초 암호화폐는 중앙금융기관의 통제에서 벗어난 탈중앙화와 철저한 익명성을 주력 무기로 삼아 성장해왔다. 이런 암호화폐의 핵심 기능이 공권력에 의해 무력화된다면 시장 불신이 확산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미국은 러시아가 보유한 암호화폐를 해킹하거나 시장 자체를 제재하기보다는 러시아 내 암호화폐 시장을 정밀타격하는 전략을 취할 것으로 전망된다. 전 세계 주요 거래소에 공문을 보내 특정 지역(러시아)에서의 암호화폐 거래를 차단해달라고 요청하는 방식이다. 다만 러시아 정부가 주도하는 암호화폐 돈세탁은 주로 개인 지갑을 통한 뒷거래를 통해 이뤄진다는 점에서 제도권 거래소를 통한 제재가 실효성이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김지훈 방극렬 기자 germa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