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종석 칼럼] 우크라 사태와 꼬이는 북핵

입력 2022-03-01 04:20

세계 3대 핵보유국 우크라가
핵 포기 대가로 독립과 안전
보장 약속 받았지만, 러시아
침략에 속수무책 함락 위기

북한은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
핵 개발 및 보유에 더 박차를
가하며 도발에 나설 가능성

대선 후보, 냉엄한 국제정세
감안해 자주적 국방력 강화
한반도 전략적 균형 및 평화
확보 방안 깊이 고민해야
우크라이나는 옛 소련 붕괴로 독립할 때 핵탄두 1700여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170여기, 전략폭격기 40여대 등을 보유했던 세계 제3대 핵보유국이었다. 그러나 1994년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등 유엔 상임이사국 요구로 ‘부다페스트 의정서’에 서명한 후 1996년까지 러시아에 모든 핵무기를 반환했다.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안전을 보장할 테니 핵무기를 포기하라는 것이 부다페스트 양해각서 골자다. 그런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지난달 19일(현지시간) 러시아의 전면적인 공격을 앞두고 이런 말을 했다. “우크라이나는 세계 3위의 핵전력을 포기하는 대가로 안전보장을 약속받았다. 이제 우리는 그 무기가 없다. 안전 또한 없다.”

2014년 러시아에 크림반도를 무력으로 빼앗긴 우크라이나. 지금은 전 지역이 러시아의 동시다발적인 공격을 받아 수도 키예프까지 함락 위기에 처했다.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세계 각국이 우크라이나의 우방을 자처하며 러시아에 대한 강력한 경제 제재 등에 나서고 있지만, 전면적인 침략을 막기엔 역부족이다. 패권주의가 횡행한 국제사회에서 의정서가 얼마나 효과 없고 아무것도 보장하지 못하는 휴지 조각에 불과한 것인지만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런 우크라이나 사태는 한반도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북핵 문제를 더욱 꼬이게 만들고 있다. 젤렌스키의 무력함을 호소하는 발언을 들으면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체제 안전을 100% 보장하는 비핵화란 있을 수 없다는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며 반면교사로 삼았을 것이다. 결국 자신의 안보를 지키기 위해서는 자력갱생, 핵 개발과 핵 보유가 훨씬 더 가치 있다는 판단을 더욱 합리화하는 근거로 삼을 가능성이 높다.

선 비핵화 방식인 리비아 모델과 달리 우크라이나 등 옛 소련 3국의 비핵화 방식은 주고받기였다. 그래서 우리 정부도 그나마 현실적인 북핵 해법으로 관심을 갖고 북한에 타진할 방안 중 하나로 검토해왔는데 쉽지 않은 상황이 됐다. 문재인정부가 한반도평화프로세스의 마지막 노력으로 북한을 끌어들이기 위해 제시한 종전선언도 의미가 퇴색되고 있다. 북한이 지난 27일 올해 들어 8번째 탄도미사일을 발사한 것은 이런 흐름과 무관치 않다. 무력시위를 통해 국제사회에 우크라이나와는 달리 핵 무력 등 자강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편 미국을 압박해 향후 협상력을 키우겠다는 의도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당장 우크라이나 사태에 집중해야 할 처지다. 북핵 등 한반도 문제엔 상대적으로 소홀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중국과 러시아에 이어 북한으로까지 대립 전선이 확대될 경우 적극적인 대응 자체가 쉽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은 미국을 압박하고 존재감을 더 확실히 각인시키기 위해 미국 본토까지 위협하는 ICBM 발사나 추가적인 핵실험 등 더 강한 도발에 나설 개연성이 있다. 미·중 갈등에 이어 미·러 간 갈등이 커지면서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의 무모한 도발에 대한 뒷배 역할을 할 수도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전문가들은 국제사회 질서가 흔들리는 틈을 타 북한이 핵보유국으로 인정받는 방향으로 더욱 강력히 밀고 나아갈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결국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로 신냉전 체제가 현실화되면서 한·미·일과 북·중·러 간 갈등과 대결 국면이 형성되면 한반도는 불확실성이 더욱 확산되고 그동안 추진돼온 평화프로세스도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

우크라이나 사태와 함께 우리나라가 대선 정국에 휩싸인 점도 북한이 오판을 할 수 있는 여지를 키우고 있다. 북한은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어떤 식으로든 북핵 문제가 부각되도록 하면서 자신들의 핵 능력 등을 과시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차기 정권을 길들이려는 의도를 내비칠 가능성이 있다.

대선이 불과 1주일여 남았다. 차기 정부를 끌고 갈 대선 후보라면 국제사회의 냉엄한 현실과 한반도 상황을 직시해야 한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놓고 한가롭게 정쟁에나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어떻게 하면 한·미 동맹을 더욱 확고히 하면서도 자주적 국방력을 강화하고, 실용적이고 적극적인 외교를 통해 한반도의 전략적 균형과 평화를 확보할 수 있을지 정말 깊이 고민해야 할 때다.

오종석 논설위원 js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