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의 100흐리브냐 지폐에는 타라스 셰브첸코란 시인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키예프의 국립대학 명칭도 타라스셰브첸코대학이다. 그는 러시아제국 지배를 받던 1814년 가난한 농노의 아들로 태어났다. 여기저기 떠돌며 그림을 그렸고, 붓에 담지 못한 생각을 시로 적었다. 폴란드 치하에서 폴란드어를, 러시아가 점령하자 러시아어를 쓰던 귀족들과 달리 우크라이나어로 시를 썼다.
그의 시는 윤동주를 떠올리게 한다. 우크라이나인의 가슴에 민족이란 단어를 처음 새겼고, 오래전 그 땅에 살았던 코사크 전사의 무덤을 노래하며 저항을 일깨웠다. 러시아의 억압 속에서 사람들은 그 시를 필사해 퍼뜨렸다. 자유의 갈망도 함께 퍼졌다. 2004년 부정선거에 맞선 오렌지혁명의 피켓마다 그의 시구가 적혀 있었다. 2014년 친러 정권을 몰아낸 마이단혁명 때 거리를 점령한 이들은 그의 시를 읽으며 노숙을 했다. 지금 동부전선 어느 참호에도 그 시집이 놓여 있을지 모른다.
1991년 독립 이후 들어선 다섯 정권은 옛 귀족과 다르지 않았다. 부패했거나 무능했거나 러시아에 빌붙었다. 그런 정권과 싸워온 우크라이나인들은 2019년 코미디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정치 경험이 전무했던 젤렌스키는 아마추어란 조롱에 시달렸지만, 최근 재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주 미국이 망명정부 구성을 제안하자 그는 “지금 내게 필요한 건 (탈출) 교통편이 아니라 탄환”이라며 거절했다. 시가전이 벌어지는 키예프 거리에 내각을 이끌고 나가 “우린 아직 여기 있다”며 영상을 공개했다. 2014년 시위대를 피해 모스크바로 달아난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보면서 국민들이 선택한 코미디언 대통령. 그는 지금 리더가 위기에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 해외 언론은 그의 리더십을 재조명하느라 바빠졌다. 이런 일을 하라고 뽑은 지도자가 바로 그 일을 해내는 나라. 우크라이나인들은 독립 이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나라에 살고 있다. “대통령 잘못 뽑아 전쟁 만났다”는 한국 정치인의 논평은 정말 뭣도 모르고 하는 소리다.
태원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