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광주에 있는 ‘베다니 동산’은 1998년 만들어진 장애인들의 보금자리다. 면적이 727㎡(약 220평)에 달하는 이곳엔 현재 지적 장애나 발달 장애가 있는 장애인 2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이 시설을 만든 주인공은 신현국(81) 목사로 최근 그는 이곳을 밀알복지재단에 통째로 기부했다. 지난 22일 서울 강남구 밀알복지재단에서 만난 신 목사는 기부를 결심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저도 이제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야 할 나이가 됐는데 이 시설을 누구에게 넘겨야 할지 고민이 많았어요. 누군가에게 돈을 받고 파는 건 옳은 일이 아니더군요. 이건 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만든 시설이니까요. 고민하던 중에 밀알복지재단과 연결이 됐어요. 신뢰할 만한 단체라고 생각했죠.”
신 목사의 인생 역정은 누구보다 기구했다. 한 인간이 감당하기엔 벅찰 정도로 온갖 고난이 간단없이 이어졌던 게 그의 삶이었다. 1941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그는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부터 목화솜이나 광목 등을 파는 사업가였다. 한데 연세대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시절, 아버지가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신 목사의 삶은 조금씩 뒤틀리기 시작했다.
신 목사는 아버지의 사업체를 물려받았는데 70년대가 되자 목화솜의 인기가 시들해졌고 결국 회사는 부도를 맞았다. 가정사도 불행의 연속이었다. 신 목사는 71년 결혼해 자녀 5명을 낳았는데 그중 3명이 장애를 안고 태어났다. 셋째는 지적 장애가 있었고 쌍둥이인 넷째와 다섯째는 뇌병변 장애로 고통을 받았다. 특히 넷째는 평생 누워서 지내다가 스무 살이던 98년 하나님 품에 안겼다. 넷째의 죽음은 신 목사가 베다니 동산을 세우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한다.
장애가 없었던 나머지 두 자녀의 삶도 비극적이었다. 신 목사가 의지했던 첫째는 30대 중반의 나이에 위암으로 숨졌다. 둘째는 난치병인 근이양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부인도 둘째와 같은 질병으로 고통을 받다가 2015년 결국 세상을 떠났다. 이 밖에도 신 목사의 두 동생은 30대에 물에 빠져 세상을 등져야 했으며 신 목사 본인도 현재 당뇨와 간경화로 투병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듯 굴곡진 삶을 살았던 신 목사가 가장 힘들었던 적은 언제였을까. 그는 “제일 고통스러웠던 시기는 내 마음이 예수님을 떠나 있었던 시기”라고 답했다. 구체적인 설명을 부탁하자 그는 70년대 말쯤 겪었던, “캄캄한 흑암 속에서 살았던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이들은 아프고 사업은 뜻대로 되지 않으니 정말 힘들었어요. 아픈 아이들만 데리고 함께 목숨을 끊을까 고민하기도 했었죠. 하지만 하나님을 영접하면서 제 삶이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인간의 힘으로 버틸 수 없다는 생각이 드니까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찾게 되더군요.”
그는 한 목회자로부터 장애인 사역을 해보라는 제안을 받으면서 목회자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82년 총신대에 입학했고 86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신 목사는 “감당하기에 벅찬 일들을 계속 겪으면서 모든 고난의 마스터키는 주님이 쥐고 있다는 걸 절감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가 그 힘든 시절을 이길 수 있었던 건 전부 하나님 덕분이었다”고 거듭 강조했다.
신 목사가 가꾼 베다니 동산의 이름은 성경에 등장하는 지명에서 빌려온 것이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동쪽 감람산 기슭에 있는 동네다. 예수님은 낮엔 사람들을 가르치다가 밤에는 감람산에 올라 기도를 드리곤 했는데, 그 산 너머에 있던 곳이 바로 베다니 마을이었다. 이곳엔 당시 세상의 가장자리에 놓인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신 목사는 “베다니 마을은 천대받는 사람들이 모인 동네였지만 예수님은 누구보다 이곳을 사랑하셨다”고 말했다.
“베다니 동산 장애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좇는 돈이나 명예 따위엔 관심이 없어요. 정말 순수한 영혼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다니 동산이라는 이름을 지으면서 이 시설이 하나님으로부터 최고의 사랑을 받는 장소가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제가 떠난 뒤에도 주님이 베다니 동산을 계속 사랑해주실 거라 믿고 있습니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