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에도 찬물로 씻었는데… 비닐하우스에 찾아온 희망 기적

입력 2022-03-01 03:05
현우(가명)네 식구가 이사 전까지 10년여 동안 살았던 비닐하우스 집. 아래는 ‘희망둥지’의 지원을 받아 이사한 현우네 집.

“냐오옹~ 유림아 이리와~ 형아가 배 문질러 줄게. 어딜 형아를 할퀴어! 이노옴! 하하하.”

지난 23일 경기도 고양 덕양구의 한 주택에 들어서자 익살스런 표정으로 반려묘와 장난을 치는 소년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 모습을 애틋하게 바라보던 어머니 김정아(가명·56)씨는 “1년여 전 이 집으로 이사 오기 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장면”이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난해 설날까지만 해도 현우(가명·12)네 집은 집이 아니었다. 마을 외딴곳에 방치된 비닐하우스와 창고가 뒤엉킨 공간이 세 식구가 간신히 몸을 누일 자리였다. 묘지와 각종 폐기물로 둘러싸여 있던 비닐하우스 안에서 공간 분리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온갖 집기가 나뒹구는 창고 구석에 위태롭게 놓인 변기 하나가 화장실이었다. 겨울이면 매서운 바람에 펄럭이는 비닐을 테이프로 붙인 채 얼음장 같은 물로 몸을 씻어야 했다.

“보증금이 한두 푼도 아니고요. 고물을 수집하는 남편 수입으로 근근이 끼니를 때워야 하는 형편이라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건 상상 속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지요. 안 그래도 아픈 아이가 춥다고 칭얼댈 때는 아이를 끌어안고 어찌나 서글프게 울었는지….”

지적장애와 주의력결핍장애(ADHD)를 앓고 있는 현우를 힘겹게 양육하는 동안 늘 튼튼할 것만 같았던 엄마의 몸도 고장이 났다. 당뇨 고지혈증 고혈압이 온몸을 짓눌렀다. 이렇게 더 버틸 수 있을까 싶었을 때 희망 한 줄기가 비닐하우스에 비췄다. 현우네 학교 도움반(특수반) 선생님이 기아대책(회장 유원식) 희망둥지 사업에 신청서를 접수해, 보증금과 이사 비용을 지원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비닐하우스 생활 10년 만에 벌어진 기적이었다.

김씨는 “집 안에 있는 화장실에서 추위에 떨지 않고 머리를 감을 수 있는 게 행복했다”며 웃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현우에겐 자기 방, 자기 책상, 자기 옷장이 생겼다. 40분을 걸어야 도착하던 학교는 이제 5분이면 충분하다. 집 같은 집에 몸이 놓이자 마음에도 변화가 생겼다. 전에는 작은 일에도 화를 내고 서로에게 생채기를 냈지만 지금은 다르다. 현우 아빠는 평생을 달고 살던 술을 끊었다. 집안에서도 무의식적으로 아빠를 피했던 현우가 요즘엔 아빠 침대에 같이 누워 장난을 친다.

현우가 희망을 품고 손수 적은 카드.

이사 한 번으로 팍팍했던 삶이 윤택해질 리 없다. 김씨는 고정적으로 나가는 약값과 현우의 치료비, 생활비 등 살림에 손을 보태기 위해 새벽 3시부터 인근 건설 현장에서 청소일을 한다. 고된 일상이 이어지고 있지만 현우네 식구의 내일은 절망보다는 희망을 향하고 있다. 김씨는 “생각지도 못한 도움이 찾아오기도 하는 게 세상인 걸 경험했다. 코로나 때문에 더 힘들어진 사람들이 많겠지만 용기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위기에 처한 이들에게 응원을 보냈다.

임정백 강동종합사회복지관장은 “복지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은 지원 시기를 놓쳤을 때 일상을 회복하기까지 속도가 더뎌지고 때론 삶을 포기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절체절명의 순간에 받은 도움을 동력으로 삶의 의지를 일으켜 세우고, 위기의 순간 ‘나 혼자가 아니구나’를 느끼게 해주는 게 핵심”이라고 덧붙였다.

충북 음성군에 사는 박은미씨(가명·42) 가족도 희망둥지의 지원으로 삶의 터전을 옮길 수 있었다. 삼남매를 키우며 행복한 삶을 꿈꿨던 박씨의 소망은 남편이 게임과 알코올 중독에 빠지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아이들을 생각해 이를 악물고 버텼지만 박씨는 결국 아이들을 제대로 양육하기 위해 2년 전 이혼을 택했다. 양육비 위자료 한 푼 받지 못한 이혼은 네 식구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위기가 밀물처럼 쏟아졌다. 코로나 여파로 박씨는 직장까지 잃었다.

박씨는 “어쩔 수 없이 이혼 후에도 시아버지댁에서 아이들과 함께 살아야 했는데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아이들을 보살펴주던 지역아동센터의 센터장이 ‘희망둥지’로 길을 내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희망둥지가 전달한 주거비 지원금을 전세자금 대출 보증금으로 활용해 한국토지주택공사에서 제공하는 아파트로 이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이들과 함께 심리 상담을 받으면서 정서적 안정도 찾았다.

박씨는 “항상 얼굴에 그늘이 있던 아이들을 보며 마음이 아팠는데 지금은 세 아이와 ‘우리 가족’이란 울타리가 어울릴 만큼 서로 의지하고 산다”며 “구직 면접을 앞두고 있는데 아이들을 생각하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임 관장은 “학령기, 사춘기 자녀를 둔 위기 가정의 경우 열악한 주거환경이 양육 및 교육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며 “코로나 시대에 온라인 교육의 비중이 커진 만큼 온라인 교육 환경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는 가정에 대한 지원도 세밀하게 준비하는 게 필요하다”고 전했다.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도록 교육비를 지원하기도 한다. 대구에 사는 정민이(가명·18)는 아버지가 두 차례에 걸친 폐 이식 수술을 받고 코로나로 가계 소득이 줄면서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로서의 길이 막힐 뻔했다. 학교 선생님의 요청이 교육비 지원으로 이어지면서 희망둥지는 정민이가 레슨을 받으며 연주를 이어갈 수 있게 해줬다. 자신의 꿈을 놓지 않은 정민이는 전국 콩쿠르 대상 수상에 이어 금난새 지휘자와 협연하는 기적을 이뤄냈다.

임 관장은 “교육적 지원 또한 생계 의료 주거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도움을 받아 꿈을 이룬 이들은 훗날 자신과 비슷한 위기를 겪는 아이들을 돕는 후원자가 된다”며 “지금은 한 아이를 도와주지만 미래를 보면 100명, 1000명의 위기 아동을 돕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