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공연계, 親푸틴 지휘자 게르기예프 잇단 ‘보이콧’

입력 2022-02-28 04:05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국제 문화예술계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친분이 두터웠던 러시아 예술가들의 공연이 잇따라 취소되거나 다른 예술가로 교체되고 있다. 가장 먼저 보이콧의 대상이 된 러시아의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왼쪽)와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 인아츠프로덕션·빈체로 제공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 예술가들이 국제 사회에서 잇따라 보이콧을 당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지지한 예술가뿐만 아니라 러시아 정부와 연관성이 있어 보이는 예술가 및 예술단체로도 확산하는 추세다. 반면 우크라이나 예술가에 대해선 연대의사를 표명하며 긴급 지원에 나섰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 총감독인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는 평소 푸틴 대통령과 각별한 것으로 유명한 만큼 우크라이나 사태가 터지자마자 악화된 여론의 타깃이 됐다. 2014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반도 침공 및 합병을 지지하는 성명을 내는 등 푸틴을 지지해온 그는 이번 사태 이후 구미의 여러 오케스트라와 극장의 포디움에서 제외되고 있다.

오스트리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25~27일 뉴욕 카네기홀, 1~2일 플로리다 아티스-네이플스에서 열리는 미국 투어 공연에서 게르기예프를 제외했다. 뉴욕 카네기홀과 빈필은 게르기예프를 대신해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음악감독 야닉 네제 세겡에게 지휘를 맡겼다. 25일 협연자 역시 러시아 피아니스트 데니스 마추예프 대신 한국 피아니스트 조성진을 내세웠다. 카네기홀은 오는 5월 3~4일 게르기예프가 지휘하는 러시아 마린스키 오케스트라 공연도 취소했다.

게르기예프는 미국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독일 네덜란드 등에서도 퇴출당하는 분위기다. 이탈리아 라 스칼라 극장은 게르기예프에게 우크라이나 사태의 평화적 해결에 대한 명확한 지지를 표명하지 않으면 3월로 예정된 오페라 ‘스페이드 여왕’ 지휘를 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라 스칼라 극장에서 지난 23일 게르기예프 지휘로 막을 올린 ‘스페이드 여왕’은 3월 5·8·13·15일 공연이 예정돼 있다.

게르기예프가 오랫동안 수석지휘자를 맡았던 독일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네덜란드 로테르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역시 게르기예프의 명확한 입장 표명을 요구하고 있다. 게르기예프가 이번 전쟁을 비판하고 푸틴 대통령과 공식적으로 거리를 두지 않는다면 관련 공연과 페스티벌을 취소할 예정이다.

영국 런던 로열오페라하우스도 7~8월로 예정됐던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의 공연을 취소한다고 25일 발표했다.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는 아예 러시아 예술가(단체)의 참가는 물론 러시아 시청자의 투표도 금지했다. 이 콘테스트는 유럽방송연맹에 소속된 각국의 방송사가 매년 선발한 대표들이 모여 노래와 퍼포먼스를 겨루는 경연 대회로 40여 회원국에 생중계된다. 유럽방송연맹 노조는 성명을 통해 “우크라이나 사태를 고려할 때 올해 대회에 러시아를 참가시키는 것은 대회를 더럽히는 것”이라고 밝혔다.

러시아 출신의 세계적인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의 덴마크 공연도 우크라이나 사태 여파로 25일 취소됐다. 네트렙코는 이날 저녁 덴마크 제2의 도시인 아르후스의 콘서트홀에서 리사이틀을 가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덴마크 내 반대 여론이 높아지자 콘서트홀은 개막을 한 시간 앞두고 공연을 취소했다.

네트렙코는 국제무대 활약을 위해 오스트리아 국적을 취득하고 현재 빈에 거주 중이다. 하지만 러시아국적도 보유한 이중국적자일 뿐만 아니라 푸틴을 지지해왔다. 네트렙코는 공연이 취소된 다음 날 페이스북을 통해 영어와 러시아어로 “나는 이 전쟁을 반대한다. 나는 러시아인이고 조국을 사랑하지만 우크라이나에 많은 친구가 있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에 마음이 아프다”면서도 “예술가를 비롯한 공적 인물에게 공개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말하거나 조국을 비난하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서구 예술계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반대한다는 네트렙코의 발표를 환영했다. 네트렙코에 앞서 러시아의 스타 아티스트들인 피아니스트 예브게니 키신, 아메리칸발레시어터 상임안무가 알렉세이 라트만스키, 독일 베를린 필하모닉 상임지휘자 키릴 페트렌코 등이 이번 전쟁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냈다. 키신과 라트만스키는 각각 영국과 미국으로 귀화했고 페트렌코는 바이에른 슈타츠오퍼 음악감독을 역임하는 등 독일이 활동거점이다. 여성 연출가로 모스크바 메이어홀드 센터 예술감독인 엘레나 코발스카야처럼 이번 전쟁에 반대하며 사직한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러시아에 거점을 둔 예술가들이 반전과 반푸틴 입장을 피력하는 건 쉽지 않아 보인다.

우크라이나 예술가들과 연대하고 지원하려는 움직임도 본격화됐다. 유럽의 대표적인 현대무용 플랫폼인 에어로웨이브즈 등 예술기관들이 앞다퉈 전쟁 반대 성명을 낸 데 이어 유럽 최대 무용 마켓인 독일 탄츠메세는 예술가들의 반전 시위 참여를 촉구했다. 에스토니아의 아트앤테크 레지던시, 덴마크의 ‘뉴 데모크라시 펀드’, 리투아니아의 로우 에어 댄스 컴퍼니 등은 우크라이나 예술가들이 머물 수 있는 긴급 레지던시를 제공하겠다고 발표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