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멘토 모리’는 ‘네가 죽을 것을 기억하라’를 의미하는 라틴어 경구다. 26일 89세를 일기로 별세한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의 평생 좌우명이었다.
고인은 73세이던 2007년 딸 고(故) 이민아 목사의 피눈물 서린 전도로 세례를 받았다. 기독교인이 된 이후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등 영성에 관한 많은 저술을 남겼다. 고인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가쁜 호흡을 몰아쉬는 말기암 투병 상황에서도 총 20권 규모의 ‘이어령 대화록’ 발간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지난달 출간한 첫 번째 책 ‘메멘토 모리(열림원)가 마지막 유작이 됐다.
고인의 신앙 여정은 15년 남짓이지만 영성의 깊이는 남달랐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할 뿐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부활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음을 죽음 직전까지 온몸으로 체험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도 기독교에 희망이 있다는 ‘코로나 패러독스’의 놀라운 메시지를 남겼다(국민일보 2021년 12월 20~25일자, 2022년 2월 19일자 참조).
지난해 크리스마스를 전후해 서울 종로구 평창동 영인문학관에서 만난 고인은 “죽음이란 무시무시한 사자를, 저 괴물을 코로나19가 인류에게 보여주고 만 것”이라면서 “민주주의가 가르쳐 온 ‘자유와 인권’ ‘프라이버시의 보장’ 같은 생명의 권리가 침해를 받아도 말 한마디 못하고 복종하는 상황을 가져온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고인은 역병의 역사를 보면 동서양이 따로 없지만 그래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뭔가의 흐름이 보인다고 했다. 페스트의 비극을 겪은 영국 런던 시민들이 쥐가 더 이상 창궐하지 못하게 목재 대신 돌과 벽돌로 도시를 재건한 사례를 들었다. 서구인들의 삶의 형태도 달라졌다. ‘위생(衛生)’ 개념이 등장하고 급기야 1660년쯤 현미경이 고안되면서 세균의 실체가 밝혀졌다고 했다. 런던 시민이 흑사병으로 죽음을 겪으면서 위생 개념이 등장하고 결국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로 이어진 사실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 전 장관은 어쩌면 코로나19가 은총일 수도 있다는 얘기도 했다. 늘 바쁜 일상 속에서 살다가 처음 ‘격리’를 경험하면서 넘쳐나는 시간과 마주하게 된 일상을 예로 들었다. 그런데 그 시간의 의미는 사람마다 달랐다. 숨어 있던 선한 예수님 얼굴을 찾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크리스천도 있다는 것이다.
고인은 신앙의 위기를 겪고 있는 이들에게 예수님도 악마의 유혹을 받았지만 지혜롭게 극복한 얘기를 전했다. 오늘날 교회나 신자들은 예수님처럼 악마의 유혹을 이기는 경우가 별로 없다고 했다. “이 세상에 돌멩이로 떡을 만들어주는 교회가 얼마나 많은지요. 홈리스에게 옷 주고 음식 나눠주는 게 종교의 본질인 줄 알아요. 영원히 죽지 않는 떡을 주는 게 ‘미션’인데 말이죠. 여기 죽지 않는 빵이 있는데, 그 빵 대신 먹는 빵을 가지고 믿는 거지요.”
고인은 평소 세상에 기적이 있느냐고 물으면 지금 인간들은 하나님의 기적 속에 살고 있는데, 뭘 기적을 더 믿으라 하느냐고 반문했다. 자신의 삶을 ‘기적’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5년 동안 암과 사투를 벌여 온 고인은 릴케의 ‘두비노의 비가(悲歌)’처럼 하나님과 대화를 나눈다고 했다. 육체적 고통과 불행을 겪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종교가 진짜 종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는데 뭘 따르라는 겁니까. 당신이 당하신 고통을 따르라는 겁니다.”
고인은 때로 명상을 하거나 잡념이 들거나 다른 생각이 날 때면 ‘주기도문’을 외운다고 했다. 몸에 참을 수 없는 진통이 올 때마다 수십 번씩 반복한다고 했다. 김성영 전 성결대 총장은 27일 “선생님을 하나님 품으로 인도한 딸 이민아 목사가 세상을 떠난 10주기 기일을 보름 정도 앞두고 별세해 더욱 안타깝다”면서 “생전 냉정하게 대한 딸한테 하늘나라에서나마 아버지의 정을 듬뿍 전해 주시기를 기도드린다”고 밝혔다. 고인의 입관예배는 오정현 사랑의교회 목사의 인도로 28일 오후 3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서 진행된다.
윤중식 종교기획위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