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증시와 기업에 대한 동학개미의 불신과 피로감이 극에 달하고 있다. 대형·우량 상장사에서 유망 사업부 쪼개기 상장과 스톡옵션(주식매수선택권) ‘먹튀’ 논란, 수천억원 횡령 사건 등이 연달아 일어나면서다. 이들 기업의 주가는 폭락했고 일부는 상장폐지 심사대에 올랐다.
기업들의 이기적이고 통제되지 않는 행태가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유발한다는 비판도 거세다. 기업 가치에 비해 주가와 증시가 저평가되는 원인이 북한 리스크 등 외부 환경이 아닌 기업 불신에 있다는 의미다. 여야 대선 후보들은 한목소리로 동학개미를 보호하고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금융당국과 한국거래소도 기업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제도 손질에 나섰다. 최근에는 입법을 통해 주주 권리를 보호하자는 ‘세이브 코스피’ 운동이 개인 투자자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27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LG화학의 주가는 물적분할로 설립한 배터리사업부 자회사 LG에너지솔루션이 지난달 상장한 후 16.6% 급락했다. 같은 기간 코스피지수는 1.2% 하락해 압도적인 낙폭 차이를 보였다. 경영진이 상장 한 달 만에 900억원어치 스톡옵션을 행사한 카카오페이도 이후 주가가 26.5% 떨어졌다.
해당 기업들의 주가 하락은 예견된 일이었다. 미래 성장성이 기대되는 알짜 사업부를 쏙 빼내 상장하면 모기업의 가치는 희석될 수밖에 없다. 기업공개(IPO)로 주가가 급등한 상황에서 이뤄진 임원의 주식 대량 매각은 거품의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대주주가 개인 투자자들이 받을 피해를 알고도 이를 용인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거액의 횡령 사건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2215억원 규모의 횡령으로 코스닥에서 주식 거래가 정지된 오스템임플란트는 지난 17일 결국 상장적격성 실질심사 대상이 됐다. 코스피 상장사인 계양전기도 245억원 횡령이 발생해 주식 거래가 정지됐다. 두 기업은 모두 특정 직원이 회계장부와 잔고 증명서 등을 조작해 회삿돈을 빼돌린 것으로 추정된다. 기업의 내부통제 시스템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천만 동학개미의 표심을 노리는 대선 후보들은 기업 규제 및 투자자 보호 대책을 앞다퉈 내놓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쪼개기 상장을 사실상 금지하고 소액주주의 일괄 피해 구제제도 등을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도 쪼개기 상장 제한과 ‘공매도 서킷브레이커제’를 공약했다.
거래소는 2022년 핵심 전략 중 하나로 주주 권리 보호를 강화해 시장 신뢰를 확고하게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물적분할 자회사의 상장 심사 시 기존 주주에 대한 보호책을 마련했는지 들여다보는 방안 등을 검토 중이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22일 신규 상장기업의 임원은 상장 직후 스톡옵션으로 주식을 취득해도 최대 6개월간 매각할 수 없도록 규정을 바꿨다.
주주에게 손해를 끼친 기업을 상대로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법제도를 개정하자는 세이브 코스피 운동은 개미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물적분할 후 동시 상장 금지,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 인정 등 8개 제도를 도입하자는 것이 골자다. 운동을 주도하는 김규식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은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근본 원인은 일상화된 기업들의 주주 권리 침해”라며 “이번 대선을 계기로 비정상적인 증권시장 구조를 고쳐야한다”고 말했다.
방극렬 기자 extre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