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대 나온 엘리트, 화가 되고 홍대 미대학장·총장까지

입력 2022-02-27 21:57 수정 2022-02-27 22:13
환한 봄날의 농원. 화살이 대지에 내리꽂힌 듯 짧은 선묘가 반복되는 원색의 화면에 생명력이 출렁거린다. ‘한국적 표현주의 화가’ 이대원(1921∼2005)의 ‘농원’ 연작은 미술시장 경매에서 꾸준히 인기를 누리는 스테디셀러다.
그런 그가 일제강점기 화가를 꿈꾸던 부잣집 자제들의 필수 코스였던 동경미술학교 등 미대 근처도 가지 못한 독학파라는 점은 놀랍다. 하지만 초등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국민 화가’ 박수근(1914∼1965)과는 차이가 있다. 경성제국대학 법학부를 나온 엘리트이기 때문이다. 둘의 공통분모는 아카데미즘의 상투성에 젖지 않은 독창성이다.

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된 이대원 작 ‘북한산’(1938, 캔버스에 유채, 80×100㎝). 일제강점기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나온 이대원이 고교시절에 그린 이 그림은 대담한 붓터치, 강렬한 색감 등 낭중지추의 기량을 보여준다. 꿈틀거리는 선에서 내면의 느낌을 표출하는 표현주의적 성정이 느껴진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대원은 경기도 파주 사람이다. 그림 속 농원은 봄이면 사과꽃 배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가을이면 붉은 사과가 주렁주렁 달리던 고향 파주의 과수원이다. 그는 연못이 있고 주변에 나지막한 산이 있어 밝고 따듯한 정기가 감도는 농원을 별세할 때까지 소유했다. 그래서 “나를 알려면 파주 농원을 가봐야 해”라고 생전에 말하곤 했다.

상경해서 청운공립보통학교(청운초등)에 다니며 5학년 때 일본인 교사로부터 유화를 배웠다. 바로 옆 경성제2고등보통학교(경복고교)에 진학했는데, 이곳엔 한국 첫 프랑스 유학파 화가 이종우와 동경미술학교 출신인 일본인 사토 구니오가 미술교사로 있었다. 특히 사토는 동시대 서구 미술인 입체주의와 피카소를 가르칠 만큼 개방적인 스승이었다. 그런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이대원은 경복고 시절인 1938년과 39년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거푸 입선했다. 근대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장욱진(1917∼1990) 유영국(1916∼2002) 심형구(1908∼1962) 권옥연(1923∼2011) 등이 선배거나 후배였다. 그들처럼 이대원도 일본 동경미술학교에 유학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꿈이 꺾였다.

이대원 (1921~2005)

결국 법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에는 극동기업을 창건했다. 열정은 어쩔 수 없어 ‘일요화가’로 살던 그는 1957년 동화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그때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어떤 그림을 그릴 것인가. 마침 56년 하버드대 세미나 참석을 계기로 미국과 독일 등지를 여행할 기회를 가졌던 그는 현지의 주요미술관을 둘러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한국적이며 동양적인 고유성을 지닌 현대회화를 창조하겠다’고 결심했다. 저명한 한국화가 심산 노수현(1899∼1978) 문하에서 서예를 배우고 중국 화보인 ‘개자원화전’을 혼자서 따라 그렸다.

동양화의 기법을 서양화에 적용한 그림은 그렇게 탄생했다. 동양화에서 나무와 산, 바위를 그릴 때 쌀알같이 작은 점을 겹쳐서 찍는 기법인 미점준(米點峻)을 차용했고 삼원법(고원 평원 심원 등 세 시점이 합쳐진 풍경 묘사법)도 구사했다. 동시대 화가들이 항아리, 달, 매화 등 소재주의에 그친 것과 달리 동양화의 기법을 서양화로 ‘번역’한 것이다. 청전 이상범은 이대원의 작품을 “서양물감으로 그린 동양화”라 불렀다. 서구의 비평가는 “화려한 색채를 추구하는 이대원의 작품의 출발점에 수묵화의 세계가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라고 감탄했다.

수묵화를 서양 물감으로 그린 듯한 ‘난초’(1966, 캔버스에 유채, 130×80㎝). 갤러리현대 제공

평생 천착한 ‘서양화의 동양적 현대화’의 실험 무대가 농원 연작이다. 처음 서양화의 점묘법을 연상시키던 점묘는 후기로 갈수록 선묘로 바뀌었다. 수묵을 연상시키던, 가라앉은 색은 충만감과 환희가 넘치는 원색으로 바뀌었다. 선과 색이 주는 율동감, 그 율동감이 풍기는 환희가 농원 역작의 매력이다.

이 짧은 선묘의 겹침은 어디서 영감을 얻은 걸까. 일본의 다데하다 아기라 교수는 파주 농원에 있는 아틀리에를 찾아갔을 때 이대원이 조선 자수 컬렉션을 보여준 경험을 이야기했다. 바느질을 통해 가는 실을 무수히 겹쳐서 면을 메우는 방식, 이대원의 회화에선 그런 자수가 연상된다.

이대원의 탁월함은 자신만의 길을 뚜벅뚜벅 걸은 데 있다. 해방 이후 미술계가 사실주의 경향의 국전 중심 제도권 미술과 재야 청년 작가들의 앵포르멜(끈적거리는 추상화)로 양분됐을 때 그는 어느 길에도 속하지 않았다. 70년대 중반 이후 몸담은 홍대의 교수들이 단색화(단색의 추상화)를 이끌 때도 그는 표현주의적 구상 회화를 했다.

세상은 그의 회화를 사랑했다. 80년대 군사쿠데타의 주역인 전두환의 사저에도 ‘농원’이 걸려 있었다. 이건희 컬렉션에 이대원의 작품이 포함됐음은 물론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하는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 명작전’에는 경성제2고보 재학시절인 38년 그린 ‘북한산’이 나왔다. 학생시절에 그린 작품인데도 예민한 색채감각과 자유로운 붓놀림에서 탄탄한 기량이 엿보인다. 이대원에게 선과 색은 형태를 재현하는 수단 이상이다. 그는 선과 색을 통해 ‘관조하는 산’이 아니라 ‘에너지를 가득 담은 산’을 표현한다. 선과 색을 통해 내면을 표출하는 표현주의, 색면을 통해 리듬과 즐거움을 표현하는 야수주의가 동시에 느껴진다. 60년대 이후 동양화의 현대화를 모색하면서도 율동적인 선과 강렬한 색의 대비에 대한 선호는 타고난 기질처럼 이어졌다.

그의 삶도 그림 속의 선과 색처럼 환하다. 귀족적이고 온화한 태도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그는 59년부터 한동안 상설화랑인 반도화랑을 운영한 특이한 경험이 있다. 화랑은 휴전 이후 서울로 환도한 정부가 외국 손님을 접대하는 호텔과 사무실로 사용하기 위해 보수공사를 거쳐 54년 개관한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자리) 안에 있었다. 원래는 아시아재단이 소유해 김환기 장우성 윤호중 이대원 등 작가들로 꾸려진 운영위원회에 맡겼지만 작가들 간 화합이 잘 안되고 적자를 면치 못하자 이대원에게 넘겼다. 인품이 좋아 주변에서 추천하는 데다 멋쟁이이고 5개 국어를 구사하는 점 등이 고려됐다.

동양적인 서양화를 모색한 결과물인 '농원' 연작(1980, 캔버스에 유채, 150×230㎝). 이대원이 운영하던 반도화랑 직원으로 있다가 독립한 박명자씨는 자신이 차린 현대화랑(현 갤러리현대)에서 10번도 넘게 이대원 개인전을 했다. 갤러리현대 제공

당시 화랑 직원으로 채용됐던 박명자는 9년간 반도화랑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70년 현대화랑을 차렸다. 박수근 그림이 외국인들에게 인기 있었는데, 사람 좋은 이대원은 외국인 컬렉터들을 이끌고 박수근의 창신동 자택으로 ‘투어’를 가곤 했다. 박수근에게 미국 컬렉터가 보내온 편지가 있으면 번역해주고 영문 편지를 대신 써주는 등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이대원은 65년부터 홍익대에 출강했고 67년에는 이곳 교수가 됐다. 하지만 미대를 나오지 않은 비주류에다 당시 유행하던 추상미술이 아닌 구상미술을 하던 그는 처음엔 외서강독교수로 채용됐다. 그런 그가 화단의 중심에 우뚝 서게 된 계기는 75년 현대화랑 개인전을 통해서였다. 점원 박명자가 차린 현대화랑이 어느새 한국 최고 화랑이 돼 있었던 것이다.

이대원은 홍익대 초대 미술대학장을 거쳐 작가출신으론 드물게 총장도 지냈다. 정년퇴직 후에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장까지 맡았다. 지인인 고고학자 김원룡의 말대로 ‘가장 팔자 좋은 사람’이 됐다. 화가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누릴 수 없었던 길이었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