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한국 젊은이들은 일본 제품을 “이거 ‘쩨일’이야”라며 자랑했다. 9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 소니 TV가 미국 가전 시장을 주름잡았다. 중저가 한국산들은 매장 한쪽 구석에 초라하게 있었다. 우리에게 일본은 ‘넘사벽’ 그 자체였다. 일본 만화가 선풍적 인기를 끌던 때라 국내 방송이 일본 프로그램을 베껴도 그리 큰 흉이 아니었다.
이제 상황이 역전됐다. 한국이 국가경쟁력과 신용등급, 1인당 명목 국내총생산(GDP) 등 주요 경제지표에서 일본을 추월했다. 경제뿐이랴. ‘한류 붐’은 일본에서도 뜨겁다. 한국의 세련된 분위기를 가리키는 ‘한국풍(風)’이라는 단어가 널리 퍼지고 있다. 젊은 여성 사이에서 한국 여행 기분을 내는 ‘도한(渡韓) 놀이’ 인증샷이 번지는 것을 보니 가슴이 먹먹하다.
백범 김구 선생은 1947년 ‘나의 소원’에서 “우리 민족이 주연 배우로 세계의 무대에 등장할 날”을 목놓아 불렀다. 그는 과연 그런 날이 오리라고 진심 믿었을까. 그 꿈이 현실이 되고 있다. 한민족 오천년 역사에 이런 때가 또 있었던가.
달콤한 꿈일수록 행여 깰까 두렵다. 우리가 언제까지 이 기세를 이어갈 수 있을까. 정치가 관건이다. 지난 30년간 한국 정치는 4류라는 오명을 달고 살았으나 최소한 경제와 문화의 발목을 잡지는 않았다. 도와주지는 못했어도 앞길을 가로막지는 않았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K드라마에 나오는 좀비처럼 정치는 혐오 그 자체가 돼버렸다. 자칫 정치가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일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라. 세상에 이런 대통령선거가 또 있겠는가. 후보들의 자질과 선거운동의 치졸함은 그야말로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수준이다. 1주일 후 누가 대통령이 되든 아무 관심도 없다. 나라의 운명이 암울하기만 하다. 정치 때문에 피땀으로 쌓아온 공든 탑이 무너지기 직전이다.
한국 정치가 이 모양인 것을 정치인 탓으로 돌리면 속은 시원할지 모르나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정치인은 국민이 만든다. 왜 후보들이 퍼주기 공약을 내걸까. 왜 선거운동이랍시고 ‘막가파식’ 흑색선전과 인신공격에 집중할까. 왜 어퍼컷에 하이킥, 야구스윙 같은 코미디를 연출할까. 모두 유권자가 호응한다고 계산하기 때문이다. 현실을 인정하자. 국민이 눈을 부릅뜨고 등을 돌리면 어느 정치꾼이 그렇게 하겠는가.
플라톤은 민주정치의 본질을 ‘아첨’으로 규정했다. 흔히 말하듯 궤변론자 소피스트들이 아테네 정치를 망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유권자가 원하는 대로 영악하게 긁어줬을 뿐이다. 환심을 사는데 아첨보다 더 효과적인 것이 있을까. 오늘날 말로 하면 포퓰리즘의 원조가 소피스트였다. 무능하고 부도덕한 정치인을 만난 것은 우리 국민의 불운이다. 그러나 그들에 휘둘리고 그들의 아첨에 속아 넘어간 국민은 어떤 책임을 져야 할까. 국민이 민주주의의 주인이라고 하지 않은가. 어느 나라든 정치는 국민 수준과 비례한다. 이제는 ‘불편한 진실’도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국민이 주인으로서 책임을 통감하기만 해도 문제는 절반 이상 풀린다.
김구 선생은 윤봉길 의사에게 마음의 빚이 컸다. 그는 해방 직후 상하이에서 돌아오는 길로 충남 예산으로 내려가 윤 의사 부인에게 절을 했다. 70세 노인이 30대 후반 시골 아낙에게 큰절을 넙죽 할 수 있는 사람이 백범이다. 그의 말이 진실되게 들리는 이유다. 김구 선생에게 큰 소원이 하나 있었다. 그는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는 것을 꿈꾸지 않았다. 오직 ‘높은 문화의 힘’을 한없이 가지고 싶어 했다. 우리 국민이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올바른 철학’을 가질 것을 희망했다. 문화와 교육의 힘으로 우리 국민성이 깨어나고 발전하기를 염원했다.
그렇다. 좋은 정치는 좋은 문화에서 시작한다. 문화는 곧 정신이다. 국민이 삶의 본질을 깊이 성찰하는데 싸구려 포퓰리즘이 어떻게 발을 붙이겠는가. 도리에 맞지 않으면 같은 편도 내칠 수 있는 합리적 국민에게 진영 논리가 통하겠는가. 좀비 정치인이 어찌 감히 명함을 내밀겠는가. 프랑스의 몽테스키외는 민주주의 시민일수록 더 많은 덕성을 갖춰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구 선생은 ‘덕의 향기’가 뿜어져 나와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의 당부처럼 ‘한번 크게 마음을 고쳐먹을’ 수는 없을까. 내일이 삼일절 아닌가.
서병훈 (숭실대 명예교수·정치외교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