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회색지대 전략

입력 2022-02-25 04:10

미국의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는 ‘회색지대 전략’을 “직접적이고 상당한 규모의 무력 사용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안보 목표를 달성하려는 꾸준한 억제와 보장을 넘어서는 노력 또는 일련의 노력”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 전략의 특징은 ‘점진주의’와 ‘애매모호함’이다. 전략을 구사하는 측은 의제를 가능한 한 잘게 썰어내는 ‘살라미(Salami) 전술’로 상대가 의도와 동기를 모르게 한다. 선제적 조치로 기정사실화해 상대가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에, 전략의 의도와 목적을 알아채더라도 사전 대비책이 없으면 대응할 수 없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금 우크라이나 침략에 이 전략을 쓰고 있다. 그는 우크라이나 동부에 파병 결정을 한 다음 날인 지난 22일(현지 시간) “당장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으로 군대를 보내려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러시아군은 이미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에 진입해 있었다.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은 이를 ‘회색 전술’이라고 평가했다.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 상원의 파병 승인 후 “지금 당장 러시아 군대가 돈바스로 간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고 말한 것도 이 전략의 일환이다. 그는 24일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작전을 승인한 뒤에도 “전쟁이 아니라 특별 군사작전을 벌이고 있다”면서 돈바스 주민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NYT는 “푸틴은 한 국가를 조각조각 해체하는 방식, 비단뱀처럼 쥐어짜는 전략을 적절히 활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를 통해 반러 성향 우크라이나 정부 전복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는 2014년 크림반도를 침략할 때도 회색지대 전략을 썼다. 중국도 동·남중국해에서 사실상 이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한·미 등을 상대로 보복까지 이르지는 않을 도발을 통해 성공적으로 목표를 달성해 온 것은 줄곧 이 전략을 써왔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많다. 우리 정부도 회색지대 전략에 대한 철저한 대비책을 세워야 할 때다.

오종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