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참기름과 첫사랑

입력 2022-02-25 04:05

금요일 밤이면 침대에 누워 주말을 위한 장을 보곤 한다. 집에서 요리하지 않고 간단히 요기만 하는 편이라 장보기는 결제까지 10분 정도면 충분하다. 편한 세상이다. 먼저 계란과 과일을 담고, 떨어진 생필품을 담고, 장바구니가 배송료 무료 금액에 도달하기까지 온라인 마켓을 돌아본다. 주로 신상품, 추천 상품이라며 프로모션을 진행하는 간편식이나 간식거리 중에 고객 리뷰가 좋은 것으로 나머지 금액을 채우게 된다. 그리고 잠이 들면 불과 몇 시간 후에 현관 앞에 주문한 물건들이 도착해 있다.

그날도 익숙하게 스마트폰의 마켓 앱을 열었다. 동물복지 계란과 딸기를 담고, 휴지와 치약을 담고, 화면과 화면을 넘나들며 익숙하게 장을 보던 중 추천 상품으로 올라온 참기름 앞에서 손가락이 굳어버렸다. 심장이 존재감을 드러내며 뛰기 시작했다. 집에서 음식을 만들지 않아서 아주 오랫동안 참기름을 산 적이 없는데, 그 시간만큼 잊고 있던 사람이 떠오른 것이다.

나의 20대를 청춘이라 부를 수 있게 해준 첫 남자친구 B 말이다. 누군가와 함께하고 이별하는 일이 얼마나 좋고 슬플 수 있는지 최초로 알게 해준 사람이다. 제품 설명에 등장하는 40년간 고집으로 참기름을 빚어온 분은 B의 아버지다. 우리가 만나던 시절, 명절이면 참기름을 선물로 받곤 했다. 국산 참깨만 사용했다는 진하고 맛있는 참기름이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장바구니에 그 참기름을 추가했다. 별5점짜리 리뷰들이 가득한 걸 보니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열고 검색을 시작했다. 헤어진 후에 오랫동안 B에 관한 어떤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이제는 결혼도 하고 아빠가 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몇 번쯤 인터넷에서 찾아보았지만 흔적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구글링하고, 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 등 SNS 채널을 뒤져도 소용없었다. 원래 세상 트렌드와 거리가 있는 사람인 건 알았지만, 그래도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이렇게 작은 단서도 없을 수가 있을까. 어느 날은 온갖 상상 끝에 B가 사고로 죽은 건 아닐까 싶어 펑펑 운 적도 있다. 우연한 곳에서 수년 만에 다시 떠오른 그 이름을 찾기 위해, 이번에는 참기름에서 출발해 보았다.

몇 시간 허탕을 친 끝에 새벽 세 시쯤 되어서야 첫 번째 단서를 발견했다. 아버지의 인터뷰에서 B가 언급되었다. 아들이 해외 진출을 돕고 있단다(살아있구나). 작은 회사지만 홈페이지에서 한국어 외에 영어, 일본어, 대만어 서비스를 하고 있었다. 대만어와 함께 B의 이름을 입력하자 드디어 B에 관한 두 번째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내 직감대로 B는 대만어를 배우러 학원에 다닌 적이 있고, 강사가 자신의 블로그에 우수 학생으로 B를 언급했다(셜록을 본 보람이 있군). 마지막으로 왔던 편지에서 탁구를 치러간다는 이야기도 기억나서 동호회를 중심으로 조사한 끝에 아마추어 탁구대회에 참가한 사실도 알 수 있었다(그는 건강하다).

예상치 못한 스토커 활동에 몰두하다 보니 새벽 다섯 시가 좀 넘었을까, 현관 앞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참기름이 도착했고,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밤새 무엇에 홀린 듯 장보기로 시작해 첫사랑의 생사를 확인하는 위업을 달성하고 나니 피곤함이 몰려왔다. 참기름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았다. 숟가락 끝에 조금 따라 맑은 참기름을 맛보았다. 고소하고 진한 그 향과 맛에 안도감이 느껴졌다. B는 살아있고, 외국어를 배우고, 탁구를 잘 친다. 정말 다행이다. 이제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나는 그제야 긴 잠을 자러 갔다.

조금 지난 이야기인데, 이날이 생각난 것은 엊그제 본 드라마 때문이었다. 백이진과 엇갈린 아버지를 찾아주려고 몇 시간을 뛰어다닌 나희도에게 백이진이 말한다. “너 여기가 어디라고 여기까지 와서 사람을 찾아.” 나희도의 대답은 며칠 내내 머릿속을 맴돌며 여러 생각과 기억들을 불러일으켰다. “찾지 않으면, 찾을 수 없잖아.”

정지연 에이컴퍼니 대표·아트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