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복지 위기, ‘인권’에서 찾다

입력 2022-02-24 22:29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저선을 요구하는 인권 운동은 197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눈부신 성취를 이루어 냈다. 하지만 지성사 연구가인 새뮤얼 모인 미국 예일대 교수는 인권 운동의 부상을 불평등의 확산과 연결시키며 “인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비판한다. 게티이미지

읽기가 쉽지 않은 책이다. 저서와 논문 인용이 빽빽하게 이어지는 데다 문장은 길고 복잡하다. 하지만 끝까지 읽게 된다. 책의 주제가 흥미롭기 때문이다.

“인권의 시대에 많은 사람은 이전보다 덜 가난해졌지만, 부자들은 오히려 승자의 입지를 더 굳혔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도덕적 위기의 정도를, 그리고 우리가 도덕적 위기에 맞설 다른 이상과 운동을 창안하는 데 실패했다는 씁쓸한 진실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인권을 우상화하지도 깔아뭉개지도 않는 적절한 관점을 취해야 한다. 모든 사람을 위한 충분한 보장에 초점을 둔 인권은 필수적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니까 이 책은 우리 시대에 신성불가침의 가치가 된 인권에 대한 비판이다. 특히 인권의 부상을 평등의 퇴조와 연결한다.


‘충분하지 않다’는 제목은 ‘인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의미다. 또 ‘충분한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Enough is not enough)는 의미이기도 하다. 인권은 모든 사람을 위한 충분한 보장을 추구하는데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뭐가 더 필요하다는 걸까. 평등이다.

유럽사상사와 인권사를 연구해온 저자 새뮤얼 모인 미국 예일대 교수에 따르면, 분배를 둘러싼 인류의 오랜 역사 속에서 충분성(sufficiency)과 평등(equality)은 두 개의 기둥이었다. 충분성이 ‘삶의 좋은 것들’의 최저치 지급과 관련해 얼마나 원활한지에 대한 것이라면, 평등은 개인이 가진 좋은 것들의 몫이 얼마나 다른지에 대한 것이다. 충분성의 이상은 재화와 용역의 최저 한계선을 정해 누구라도 그 아래로 내려가지 않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나는 일부 사람들이 얼마나 부유할 수 있는지에 신경 쓰지 않는다. 그로 인해 비참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한.” 토마스 페인이 1796년에 쓴 이 말은 충분성 지지자들의 생각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평등의 이상은, 모두가 충분히 가졌고 가장 못한 이들이 빈곤을 면했다고 해도 부의 불평등이라는 심각한 위계는 여전히 남는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불충분성으로부터 보호하는 하한선만이 아니라 불평등을 제한하는 상한선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렇지 않으면 두 개의 사회가 생겨나는 것처럼 돼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책은 충분성과 평등에 대한 긴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두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고 전개됐는지 상세하게 탐구한다. 인권과 복지 담론에 대한 지성사라고 할 수 있다. ‘능력에 따라 각자로부터, 필요에 따라 각자에게’로 유명한 마르크스의 원칙,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정립한 베버리지 보고서,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제2권리장전 연설, 1948년 세계인권선언 등 많은 문서와 사상가들이 인용된다.

저자에 따르면 충분성과 평등은 고대 그리스·로마에서부터 프랑스 혁명에 이르기까지 긴밀하게 연결돼 있었다. 19세기 말 독일 비스마르크 시대, 20세기 초·중반의 사회주의 국가들, 전후의 서구 복지국가들에서도 평등주의라는 목표는 진지하게 추구됐다. 세계에서 사회경제적 보호의 필요를 가장 늦게 인식한 문명국가인 미국에서도 뉴딜과 제2권리장전 등에 이런 생각이 반영돼 있다. 세계인권선언도 복지국가에 대한 헌장이었다. 지금 해석되는 것처럼 단순히 사상이나 표현, 신체의 자유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특히 20세기 중반 서유럽 복지국가의 출현은 두 가지 이상의 진전에서 핵심이 되는 사건이었다. 모든 타협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복지국가는 단지 빈곤층을 돕는 일에서만 진전을 이룬 게 아니었다. 저자는 “복지국가는 지금까지 분배의 평등을 조금이라도 확보했던 유일한 정치 사업이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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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서구 복지국가를 세계적 차원으로 확장하려던 탈식민지 국가들의 기획이 좌초되고, 시장주의가 승리를 거두면서 평등이라는 기둥이 뽑혀 버렸다. 사회주의가 세계에서 사라지는 동안 인권이 정의의 핵심 언어로서 호소력을 갖게 됐다. 197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초국가적 인권운동이 획기적 현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모두가 거처와 생계 수단을 가져야 한다는 ‘기본 욕구’라는 개념이 인권으로 통합됐다. “무너진 헛된 기대의 폐허 위에서 갑자기 빈곤 완화가 주된 달성 목표로 떠올랐다.” 그렇게 충분성이라는 이상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인권이 분배와 연관됐던 역사는 잊히고 말았다.

“인권은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 경제에서 합의된 공공 철학 같은 지위를 얻은 1990년대에 전 세계 윤리에서 그 같은 지위에 올랐다.”

저자는 평등이라는 이상이 제거되는 과정과 인권이 부상하는 과정이 겹친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는 “인권에 대한 관심은 분배의 평등에 대한 도덕적 헌신이 무너지면서 일어났다”고 분석한다. 그러면서 “인권이 도덕의 공용어가 된 것이 시장근본주의의 성장, 혹은 적어도 국민 복지의 쇠퇴와 정말로 아무 관계가 없을 수 있을까”라는 새로운 질문을 제기한다. 이 질문이야말로 이 책의 핵심 주제라 할 수 있다.

저자는 눈부신 진보로 평가돼온 인권의 시대를 신분의 평등은 증가하고 물질적 평등은 감소한 시대로 서늘하게 평가한다. 인권 운동이 “분배와 관련된 문제들을 묵살하거나 소외시켰고, 불평등의 조건들이 조성되더라도 신경 쓰지 않았다”며 “인권은 놀라운 수준으로 불평등의 포로가 됐다”고 비판했다.

“인권정치와 인권법은 독재적·전체주의적 국가들의 끔찍한 억압과 가시적인 빈곤의 참상에 대한 인류의 감수성을 깨우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국민 복지의 위기, 중산층의 정체, 전 지구적 위계질서의 지속에 관련해서는 그렇지 못했다. 인권 규범과 인권 정치는 충분한 보호에 초점을 두어 결국 사회정의의 한쪽 면만을 선택적으로 강조하고 특히 부자들의 분배적 승리를 경시했다.”

저자는 “아무리 완벽하게 실현된 인권이라도 인권은 불평등과, 심지어 근본적인 불평등과 양립할 수 있다”며 “인권이 세계의 미래를 열어줄 유일한 열쇠, 혹은 주된 열쇠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고 그 한계를 지적한다.

책은 분배의 정의를 이루는 두 기둥 중 하나였던 평등이라는 이상이 사라지는 과정, 충분성 이상을 계승한 인권이 산자유주의 시대의 지배적인 정의로 떠오르는 과정을 조명하며 정의가 평등과 맺었던 애초의 관계를 상기시킨다. 그러면서 우리 시대의 인권과 정의는 충분하지 않다, 평등이라는 잃어버린 동반자를 다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