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의 동물학대 사건에 대한 처벌과 대책을 촉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20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었다. ‘방송 촬영을 위해 안전과 생존을 위협당하는 동물의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제목의 이 청원은 지난달 21일 올라와 청원 마감인 지난 20일 동의 20만1649명을 기록하면서 정부의 공식 답변을 받을 조건을 확보했다. 청원인은 “2022년 공영방송 KBS가 행하는 촬영 현장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장면”이라며 “방송을 위해 동물을 소품처럼 이용하는 행태는 오래전부터 지적돼 온 사항인데도 KBS가 동물의 안전 보장을 위해 어떤 장치도 마련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시민이 분노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사건은 지난달 19일 동물자유연대가 “태종 이방원 제작진이 최근 촬영 중 말을 학대했다”는 성명서를 내며 공론화됐다. KBS는 조사 결과 해당 말이 촬영 1주일 후 사망했다며 사과하고 지난 9일에는 출연 동물의 안전 보호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내놨다. 그런데도 청원 동의자가 꾸준히 늘어 20만명을 돌파했다는 것은 국민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해와 동정의 여지가 전혀 없는 사건이었다. ‘좋은 작품을 제작하기 위한 충정’에서 비롯된 비극으로도, 빠듯한 제작비나 어려운 제작환경 때문에 빚어진 참사로도 볼 수 없다. 동물을 학대하고 생명을 빼앗으며 만든 작품이 좋은 작품일 리 없다. 제작비든 제작 여건이든 핑계일 뿐이다.
근본 원인은 KBS 구성원이나 드라마 제작진에게 출연 동물의 안전과 생명에 대한 문제의식이 전혀 없었다는 데 있다. 할리우드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영화의 제작과정 중 어떤 동물도 다치거나 해를 입지 않았습니다’는 문구를 KBS 구성원만 보지 못했을 리 없다. KBS는 여러 차례 자체 뉴스와 다큐멘터리를 통해 동물학대를 고발하고 동물권의 중요성을 알려왔다.
사전 경고와 제안도 있었다. 불과 1년여 전인 2020년 10월 동물권행동 카라는 ‘동물 출연 미디어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기본 원칙은 물론이고 동물의 촬영 시간과 쉼터 환경, 운송지침, 촬영방식까지 제안했다. 위급 상황에 대비해 인근 동물병원 위치를 사전에 파악하고 거리가 멀면 수의사를 대동하라는 조언, 촬영 현장에서 동물학대 정황을 포착하거나 이런 영상을 접했을 때, 고발·신고하는 절차와 방법도 담았지만 귀 기울이지 않았다. KBS는 국민의 수신료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이다. 유튜브 개인방송에서도 있어선 안 될 일이 공영방송에서 발생했다. 시청자들은 ‘소중한 수신료의 가치’를 동물학대로 돌려받았다는 분노와 함께 반생명적 만행의 공범이 됐다는 죄책감까지 들었다. 외신도 주목했다. CNN은 KBS의 공식 사과 사실을 보도하며 “동물학대”라고 지적했고 올케이팝은 “명백한 동물학대다. 시대에 역행하는 촬영 방식이 놀랍다”고 비판했다. ‘대한민국 대표 공영미디어’라고 자부하는 KBS가 대한민국의 국격을 훼손하고 K드라마 열풍에 찬물을 끼얹었다. 공영방송 KBS의 배신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공영방송에 대한 국민 기대는 상업방송이나 개인방송보다 높다. 동물학대만 문제가 아니다. 한국 방송사의 제작 현장은 한류 현상을 자랑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열악하고 후진적이다. 제작진·출연진의 안전과 건강, 프리랜서라는 이름의 편법 내지 불법 고용, 부당해고, 저임금 장시간 노동 등 방송의 미래를 어둡게 만드는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이런 문제가 수십년간 방치됐다는 것은 동물권뿐 아니라 기본적 권리에 무신경하다는 방증이다. 시청자들은 완성도나 수익, 시청률 외에 제작 과정에서도 수신료의 가치가 빛나기를 원한다.
송세영 문화체육부장 sysoh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