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목사지만 금식을 그리 강조하는 편이 아니다. 형식적인 금식을 하느니 차라리 “잘 먹고 잘 싸우라”고 권면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가 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금식의 정신은 늘 기본으로 돌아가는 데 있기 때문이다.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 하고(욜 2:12~19) “금식과 구제 기도를 하되 바리새인처럼 하지 말고 진심으로 하라”고 가르친다.(마: 6장)
‘금식’ ‘구제’ ‘기도’ 이 세 가지는 예수님 당시 유대인의 신앙을 판단하는 시금석이어서 금식과 구제사업, 기도를 잘하면 그만큼 신앙 좋은 것으로 생각됐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신앙의 척도를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은밀한 중에 하라” 명령하신다. 그렇다면 몰래 하라는 뜻일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뜻이 더 강하다.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행하라’는 의미이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회개’ 또는 동의어인 ‘참회’가 된다.
나는 참회라는 말을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양심의 삶’으로 이해한다.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죽음을 각오한 일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부활의 약속 덕분에 하나님 앞에서 예민한 양심으로 사는 사람은 절망 대신 소망 안에서 산다. 이 소망 안에 있을 때 비로소 참회의 의미가 새롭게 탄생한다.
사족 하나 붙여본다. 이제 얼마 있으면 부활절을 기다리는 사순절이 다가온다. 어떤 분이 질문하는 게 약간 창피한 듯 조심스레 사순절의 첫날인 ‘성회 수요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괜찮다. 나도 ‘성회 수요일’을 ‘거룩한 집회 모임’을 뜻하는 ‘성회’인 줄 알고 있던 적이 있다. 알고 보니 ‘거룩한 재’를 뜻하는 성회(聖灰, Ash)였다. ‘재를 뒤집어쓰고 참회한다’는 뜻이 여기 담겨 있다. 모르면 물어보면 된다. 창피할 필요 없다. 어차피 알고 보면 다들 매한가지다.
어찌 됐건 재의 수요일을 기점으로 사순절이 시작된다. 사순절은 주일을 제외한 40일이다. 기독교인에게 주일은 주님의 부활을 기리는 ‘주님의 날’이기에 사순절 계산에서 세지 않는다. 주일은 다른 말로 ‘작은 부활절’이다.
다시 돌아가 보자. 참회의 계절인 사순절이 오면 교회는 항상 ‘금식 구제 기도’를 강조하는데 나는 이걸 다른 말로 바꿔 본다. 하나님 앞에서 하는 뺄셈, 덧셈의 삶. 좀 엉뚱한가.
냉정히 말해 금식 구제 기도, 이 세 가지는 내 일상의 먹거리(금식), 일상의 돈과 소유물(구제), 일상의 시간(기도)을 빼내는 뺄셈 아닌가.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원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고 주인도 하나님이었던 것들이다. 그러니 잠깐이라도 내 생명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유념하고 살겠다는 표현이 금식 기도 구제의 본질이다. 그리고 그렇게 내 소유의 뺄셈을 하고 난 빈자리에 부활의 소망을 더하겠다는 것이 사순절 정신이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덧셈의 삶을 사는 길이다.
이제 사순절이 시작되면 여기저기서 금식한다고 요란 떠는 소리가 들릴 텐데 참된 금식의 본질을 ‘곡기를 끊는 것’(뺄셈)에서 찾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이웃을 먹이는 것’(덧셈)에서 찾으면 좋겠다. 특별한 교회 절기 따지지 말고 배불리 먹어도 된다. 다만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웃을 어떻게 먹일지 기도하고 자기 소유에서 직접 떼는 연습이 반드시 필요하다.
어디 금식뿐이랴. 삶을 가만 돌아보면 ‘빼고 살아도 될 것’ ‘더하여 살 것’이 한둘이 아니다. 사람 사귀고 사람 뽑는 일도 마찬가지다.
최주훈 중앙루터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