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 이태준 기념관, 붉게 타올랐던 그날의 만세 함성

입력 2022-02-23 21:26
경남 함안군 칠북면 이령리 야산에 조성된 3·1독립운동기념비. 만세 부르는 형상의 기단 위에 검은색 비신과 태극기를 새긴 옥개석을 얹었다.

삼일절이 5일 앞으로 다가왔다. 일제에 항거해 독립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진 3월이다. 유린당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독립만세를 외치며 목숨을 바쳐서 노력했던 선조들을 되새겨야 할 시점이다. 이름만 들어도 바로 떠올리는 독립운동가도 많지만 덜 알려진 순국선열도 적지 않다.

경남 함안 출신으로 항일운동에서 큰 공로를 세웠지만 빛나는 업적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 중 한 분이 대암(大岩) 이태준(李泰俊·1883~1921) 선생이다. 국내보다 몽골에서 더 유명하다.

대암 선생의 독립운동 업적과 그의 남다른 희생정신으로 점철된 일생을 많은 이에게 알리기 위한 ‘대암 이태준 기념관’이 지난해 11월 함안군 군북면 옛 군북역사(驛舍)터에 문을 열었다. 선생의 삶과 독립운동 역사 등이 오롯이 담긴 공간이다.

지난해 11월 함안군 군북면 군북역사터에 문을 연 대암 이태준 기념관 내부. 선생의 희생정신과 독립운동의 역사 등을 담고 있다.

기념관에 들어서면 벽면에 기록된 대암 선생의 연도별 발자취에 가장 먼저 눈이 간다. 군북면 명관리 출생인 선생의 성장 과정과 1907년 24세에 세브란스의학교에 입학해 독립운동을 펼친 일대기가 상세하게 펼쳐진다. 큰 글씨 설명과 사진자료는 물론 터치스크린으로 구현된 다양한 전시물이 누구나 쉽게 관람할 수 있도록 한다. 함안에서 서울, 중국 난징, 몽골 울란바토르 등 알고 싶은 경로를 선택해 화면에 손을 대면 상세내용을 볼 수 있다. 38세의 젊은 나이에 러시아의 백위파 부대에 안타까운 죽음을 당하기까지 삶이 담겨 있다.

가난한 농사꾼의 2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나 어릴 적 도천재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1906년 돈을 벌기 위해 상경했다. 타고난 근면 성실을 인정받아 기독교 선교사를 통해 1907년 세브란스의학교에 입학해 11년 6월 세브란스의학교 제2회 졸업생으로 의사가 됐다.

세브란스의학교 재학시설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감화를 받아 항일 독립운동에 뜻을 세우고 도산 선생의 권유로 비밀청년단체인 청년학우회에 가입했다. 기념관 한쪽에 대암 선생과 도산 선생이 주고받은 편지의 원문과 해석본도 화면으로 제공된다.

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돼 난징으로 망명해 기독회의원에서 의사로 일했다. 14년 김규식 선생의 권유로 몽골로 건너가 동의의국(同義醫局)이라는 병원을 개원했다. 동의의국은 중국과 러시아를 연결하는 독립운동 거점기지와 몽골에 사는 동포들의 영사관 역할을 했다.

대암 선생은 당시 몽골에서 유행하는 전염병을 퇴치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몽골 마지막 국왕의 주치의가 돼 19년 7월 몽골 최고 훈장인 에르데니 인 오치르를 받았다. ‘몽골의 슈바이처’라는 수식어가 붙었고 몽골에서는 신의(神醫)로 불린다.

군북 기념관 뒷문으로 나가면 대암 선생의 흉상이 있다.남쪽으로 멀리 백이산과 숙제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아래 선생이 태어난 명관리와 어려서 공부한 도천재가 자리한다.

군북역사터 일대는 함안독립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군북역은 일제강점기 때 마산~군북선 철도 종착역이었다. 함안 들녘에서 수탈한 쌀을 마산항으로 보내는 역할을 했다. 이곳에 증기기관차 모형이 설치됐다.

함안은 독립만세운동으로도 유명하다. 경남에서 만세운동의 불길이 가장 먼저, 가장 뜨겁게 타올랐던 곳이다. 19년 3월 9일 시작돼 4월 3일까지 34일간 11회 이상 이어졌다. 독립만세를 외치다 20명이 목숨을 잃었고 일본군경의 피해도 군단위로 전국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치열했다. ‘이것은 본도(경남도)에서 악성의 소요로서 그 정도도 전체로 보아 가장 심하였다’는 일본군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발화지는 칠북면 연개장터다. 칠북면 이령리 연개장은 낙동강 밀포(멸포)나루를 통해 마산과 부산 등의 해산물과 함안 창녕 밀양 의령 등의 농산물이 교역되는 큰 장이어서 상인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었다. 반면 일본경찰의 치안은 다소 느긋해 군중을 동원하기 쉬워 만세운동을 준비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연개장터 위에 세워진 칠북초등학교 이령분교. 건물 오른쪽 뒤에서 ‘3·1 독립운동기념탑’을 만날 수 있다.

뜨거웠던 만세 외침으로 가득했던 연개장은 지금 사라지고 없다. 조선총독부가 연개장터 만세운동이 경남 각 지방으로 확산되자 장을 폐쇄하고 가게를 헐어버렸기 때문이다. 현재 그 자리에는 칠북초등학교 이령분교가 세워져 있다. 넓은 운동장을 지나 학교 건물 뒤편으로 들어서면 기념탑을 만날 수 있다.

연개장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함안읍내로 이어졌다. 19년 3월 19일부터 20일까지 이어진 함안장터와 군북 만세운동은 삼남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단기간 현장에서 낼 정도로 치열했다. 함안장날이었던 3월 19일 함안장터에서 약 3000명의 군중이 만세를 부르며 행진을 시작했다. 주동 인물로 검거된 이만 65명에 달했다. 재판 결과 43명이 6개월에서 7년 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튿날인 20일 군북에서도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군북 공설운동장 건너편 냇가에 세워진 ‘3·1독립운동 기념탑’이 당시의 상황을 설명한다.

여행메모
이태준 기념관 월요일 휴관
일몰 명소 악양루 일대 산책

서울에서 함안까지 차로 4~5시간 소요된다. 이태준 기념관은 군북면 지두2길 50에 자리한다. 남해고속도로 군북나들목에서 가깝다. 화~일요일 오전 9시~오후 6시 운영한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다. 입장료와 주차료는 없다. 칠북면 이령리로 가려면 중부내륙고속도로 남지나들목이 편하다.

대암 선생 생가지는 명관저수지 조성으로 수몰됐다.

함안은 6·25전쟁 격전지 가운데 한 곳이다. 전쟁 애환을 노래한 ‘처녀뱃사공’ 노래비가 남강이 흐르는 악양루 인근에 서 있다.

빨간 풍차 등을 갖춘 악양둑방길.

악양루는 일몰 명소다. 악양루에서 산책로를 따라 200m가량 걸으면 악양생태공원이다. 26만5300여㎡ 부지에 잔디와 생태연못, 놀이터와 오솔길 등이 있다. 건너편은 악양둑방길이다.





함안=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