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사람은 하루 세 번 삼시(9시)와 육시(12시), 구시(오후 3시)에 기도했습니다. 구시에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기 위해 성전을 찾았는데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걸인을 만났습니다.
두루미는 1000번을 기도해도 물고기 한 마리가 전부이고, 참새는 100일을 기도해도 쌀 한 톨 얻는 게 전부입니다. 대선 후보들이 혹 40일 금식기도를 한다 해도 대통령 되는 게 전부일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걸인도 동전 한 닢 얻는 게 전부였을 것입니다. 모두 어리석은 인생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새해가 되면 많은 사람이 신년 운세에 관심이 많습니다. 흔히 ‘운수대통’이라고 합니다. 운이 좋아서, 때를 잘 만났다고 하지만 우연히 운이 좋고 때를 잘 만났다면 우연히 불운이 찾아와 다 잃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우연은 없습니다. 운이나 때를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합니다. 세상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 베드로와 요한을 만난 걸인을 통해 몇 가지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그는 남에게 짐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장애는 슬픔과 눈물을 동반합니다. 본인의 장애를 떠안고 살아가야 하는 가족들의 고통도 만만치 않죠. 본인 때문에 스트레스받아가면서 지내는 가족들을 보며 죄책감을 떠안고 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는 구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동전 한 닢을 얻기 위해 행인들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구걸하는 가난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었죠. 그가 앉은 장소도 특이합니다. 성전 미문이었죠. 미문은 말 그대로 가장 아름다운 문인데 그는 매일 성전 입구에 앉아 있으나 한 번도 성전 안으로 들어가 본 적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에게 구걸하는 인생이지 하나님을 찾는 인생은 아니었던 셈이죠. 사람들의 작은 동정심이 필요할 뿐이지 하나님의 은혜는 소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돈만 구걸했고, 돈이면 만족하는 인생이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우리가 간절히 구하는 것도 이 걸인과는 다른지 돌아봐야 합니다. 매일 금과 은을 구하지만,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인생을 산다면 옳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인생은 아니죠. 그리스도인이 이래서는 안 됩니다.
남의 손을 잡아 일으키는 사람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원래 어부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배운 게 물고기 잡는 일이었죠. 어떨 땐 밤새 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는 무능한 남편이었고, 자식에게 가난을 대물림해야 할 처지의 아버지였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난 뒤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그가 금과 은은 없지만 구걸하는 사람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웁니다. 불행한 남의 인생을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켜 새 인생을 살게 한 것이죠. 베드로가 능력이 많아서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만 그는 매일 성전으로 들어가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매일 경건의 훈련 없이 기적은 없습니다. 일상이 바빠도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는 자리까지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남에게 짐이 되는 삶을 사는 건 아닐까요. 구걸하며 사는 건 아닐까요. 다시 기도의 자리로 올라가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사람만이 남에게 손을 내밀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기도의 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500여 명 모이는 규모의 교회 1000개 이상이 사라질 만큼 교인들이 교회를 떠났다고 합니다.
성도가 교회를 떠난 게 코로나 때문인가요. 아니면 교회의 문제인가요. 아닙니다. 기도가 끊어지면 작은 문제도 태산처럼 서서히 커질 수 있습니다. 성도 된 우리가 기도를 잊은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처럼 성전으로 기도하러 올라갑시다. 찾아가야 할 때입니다.
강오성 목사(수원 행복한은혜교회)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 소속인 강오성 목사는 수원 행복한은혜교회에서 지역사회와 함께 호흡하며 그리스도인 다운 그리스도인을 양육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