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4년 가을, 서종태(1652~1719)는 강원도 금성현의 원님으로 부임했다. 금강산이 멀지 않은 고을이었다. 금강산 여행은 그가 20년 동안 마음속에 담아둔 버킷리스트였다. 하지만 추수가 한창인데 원님이 놀러 갈 수는 없는 일. 금강산 여행은 엄두조차 내기 어려웠다. 때마침 조정에서 재해를 입은 예하 읍면을 실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는 이참에 금강산 언저리라도 밟아보자는 생각에 짐을 가볍게 꾸리고 하인 몇 사람만 대동한 채 9월 9일 길을 떠났다.
서종태는 이튿날 피해 현장에 도착하여 조사를 마치고 저녁 무렵 금강산 여행의 베이스캠프 장안사에 도착했다. 다음날 표훈사를 경유하여 최종 목적지 정양사에 도착했다. 해발 800m에 불과하지만 내금강 전역이 조망 가능한 곳이다. 서종태는 이곳에서 금강산의 유명한 봉우리와 골짜기를 바라보는 것으로 마음을 달랬다. 이튿날 귀로에 오른 그는 왔던 길을 되짚어 13일 낮 금성 경내로 돌아왔다. 3박4일간의 짧은 여행이었다. 그래도 볼 것은 다 봤다. 비로봉, 중향성, 향로봉, 만폭동을 비롯한 금강산 명승을 멀리서나마 구경했다.
짧지만 알찬 여행이 가능했던 것은 노련한 여행 가이드 덕분이었다. 그의 이름은 우정신. 당시 일흔이 넘은 노인이었다. 우정신은 젊은 시절 한양에 살았다. 성격이 호탕하고 놀기를 좋아했다. 이름난 벼슬아치들 밑에서 일한 덕에 조야의 옛일을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중년에 귀농하여 금성현 기성리(현 북한 김화군 창도면)에 터를 잡았다. 금강산 여행자는 이곳을 지나기 마련인데, 우정신은 그들을 재워주고 먹여주며 길잡이를 자처했다. 수십 번 넘게 금강산을 드나들며 경로와 풍경을 속속들이 파악했다. 그가 늘어놓는 금강산 이야기는 마치 눈앞의 물건을 설명하는 것처럼 정확하고 자세했다. 사람들은 그를 ‘금강산 주인’이라 불렀다. 서종태는 금강산 주인의 도움에 힘입어 헤매는 일 없이 최단 경로로 최고의 경치를 구경하고 돌아왔다.
서종태의 기록에 따르면 우정신은 일흔이 넘었는데도 혈기왕성하여 걸음걸이가 나는 듯했다. 머리가 똑똑하고 글도 잘 이해했으며 무엇보다 지역 사정을 줄줄 꿰고 있었다. 인근 고을 수령들이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못하는지, 어느 곳이 경치가 좋고 농사가 잘되는지, 그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한다. 서종태는 고을 수령의 체신도 잊은 채 그와 자주 어울렸다. 이듬해 여름, 서종태는 임기를 마치고 조정으로 돌아가며 우정신에게 시 한 편을 지어 주었다. “구룡연과 총석정 구경하자는 약속, 노인이여 노인이여 저버리지 마시오.” 다음번에도 가이드를 맡아 달라는 신신당부였다.
아쉽게도 서종태는 두 번 다시 금강산을 찾지 못했다. 조정으로 돌아간 뒤 승승장구하여 영의정까지 올랐지만 우정신과 함께한 경험이 처음이자 마지막 금강산 여행이 되고 말았다. 우정신의 뒷일도 알 수 없다. 서종태가 떠난 해 가을, 이희조(1655~1724)의 금강산 여행안내를 맡았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이때는 금강산 탑거리에 살았다고 한다. 아예 금강산 아래로 거처를 옮긴 모양이다. 아마 그곳에서 여생을 마치지 않았을까.
금강산 주인 우정신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에도 전문 여행 가이드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생계를 꾸리기 위한 직업은 아닌 듯하지만 전문성을 인정받은 건 분명하다. 그는 누구보다 금강산을 잘 알고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금강산 주인이라는 그의 별명은, 소유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준다. 꼭 내 것일 필요는 없다. 소유한 자가 주인이 아니라 즐기는 자가 주인이다.
장유승(단국대 연구교수·동양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