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부다페스트에서 얻은 자유

입력 2022-02-23 04:06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를 고스란히 맞는 상상을 한다. 감성적인 날 유난히 그렇다. 무섭게 쏟아지는 빗속으로 사라져 그동안 쌓이고 쌓인 내면의 때를 씻어내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한국에서 시원하게 비에 젖어본 기억은 한 번뿐이다. 제주도에 태풍 불던 날 출근하고 있는데 우산이 바람에 갈기갈기 찢기다 못해 하늘로 날아가 버려서 비 맞으며 걸었다. 속옷까지 축축해질 정도로 젖으면서 뭔가 해소되는 기분을 느꼈다. 그 개운한 기분을 비 내릴 때마다 느끼기엔 한국에서 우산 없이 빗속을 걷는 건 너무 눈에 띄었다.

부다페스트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이 우산을 쓰지 않는다. 이곳에서 처음 온몸으로 비 맞은 날이 떠오른다. 다뉴브강을 따라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는데 갑자기 수많은 새 떼가 하늘을 뒤덮으며 한 방향으로 도망가듯 날아가고 있었다. 그 광경이 멋있다고 느끼던 찰나 하늘이 어두워지며 장대비가 쏟아졌다. 우산이 없어서 당황하고 있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부다페스트 사람들 모두 비가 뭐 대수냐는 듯 여유롭게 갈 길 가고 있었다. 그날부터 나도 비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사람이 됐다. 양손이 자유로움을 얻게 된 것.

올겨울 부다페스트 날씨가 따뜻해서 비가 자주 내렸다. 우산 쓰기를 포기하니까 날씨 확인할 일이 없어서 편했다. 우산은 그저 공간만 차지하는 방해물로 여기게 됐다. 우산으로 옆 사람을 찌를 일 없고 일행과 멀찍이 떨어져 걸을 필요도 없어서 좋다. 곧 한국으로 돌아가는 시점에 내가 부다페스트에서 얻어가는 건 ‘자유’가 아닐까 싶다. 양손으로부터의 자유를 시작으로 불안과 사랑,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를 얻었다. 시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자유라고 생각한다. 왜 어른들이 시야를 넓히면 내면이 넓어진다고 했는지 알 것 같다. 이곳에서 힘들게 얻은 삶의 여러 재미와 지혜를 독자들에게 들려줄 일만 남았다. 이제 원고를 마무리 지을 타이밍이다.

부다페스트(헝가리)=이원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