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유령과 좀비

입력 2022-02-22 03:03

‘K좀비’가 세계적인 호평을 받고 있다. 미국 ‘워킹 데드’ 시리즈의 쇠락과 더불어 좀비물이 사라질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K좀비가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좀비 영화가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냐는 생각을 하는 분들은 ‘부산행’ ‘킹덤’ ‘지금 우리 학교는’ 중 하나를 골라 시청해 보기를 권한다. 방대한 스케일이나 디테일한 연기도 훌륭하지만, 무엇보다도 K드라마 특유의 탄탄한 스토리 때문에 몰입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나 때는 좀비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고 대신 유령이 있었다. 무더운 여름밤 식구들이 흑백 TV 앞에 모여 앉아 납량특집 ‘전설의 고향’을 숨죽여 보았었다. 음산한 효과음과 더불어 흰 치마저고리 입은 유령이 입에서 피를 흘리며 “내 다리 내놔라” 호통을 치면, 꺅 소리를 지르며 이불을 덮어쓰곤 했다. “내가 아직 네 친구로 보이니?” 학교를 배경으로 한 ‘여고괴담’ 시리즈의 유명한 대사다.

유령과 좀비는 비슷한 점이 많다. 유령이 육체가 없는 영혼이라면 좀비는 영혼 없는 몸이다. 유령이 죽었는데 아직 죽지 못한 자라면, 좀비는 산 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죽은 자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는 인간 사회에서 이질적이면서 위협적인 존재다. 유령을 만난 사람은 공포에 떨다 죽고, 좀비에게 쫓기는 사람은 피를 빨린 후 자신도 좀비가 된다.

유령과 좀비가 서로 다른 점도 많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유령은 저마다의 사연이 있는 개인인 반면, 좀비는 개인의 이야기가 제거된 욕망의 덩어리다. 유령 영화의 주인공은 모두 억울하게 죽임당한 사람들로서, 원귀(寃鬼)가 되어 자신을 해친 사람에게 나타나 복수한다. 때로 산 사람에게 빙의하여 자신의 사연을 토로하고 감정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좀비의 경우, 좀비가 되는 순간 개성도 사고력도 자유도 없어지고, 심지어 본능적 사랑이나 고통도 중지된다. 딱 한 가지 남은 것이 있다면 배고픔이다. 아무리 먹고 또 먹어도 배가 늘 고프다. 배고픔 앞에서 천륜도 우정도 사랑도 없다. 그러고 보니 K좀비는 욕망만 남은 우리 시대의 상징이다. 개인의 개성과 사연은 모두 배고픔으로 수렴되고, 정의와 평화의 담론은 생존 논리에 자리를 내어주었다. 부와 권력을 대놓고 자랑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차별한다. 욕망만 채울 수 있다면 이단과 사교도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아니 그런 사회야말로 이단이 배양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다.

좀비가 유령보다 무서운 것은 그 집단성 때문이다. 개인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치는 우리 시대에 집단주의가 다시 득세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극단은 서로 통하는 법, 극단적 개인주의는 집단주의와 손을 잡았다. 게다가 선거철을 맞아 권력을 잡으려는 사람들이 두려움과 혐오를 불쏘시개 삼아 집단 이기주의를 부추긴다. 시력은 퇴화하고 청력만 남은 대중은 음모론에 주체성을 빼앗기고 희생양을 찾아 달려든다. 먹잇감을 향해 달려드는 좀비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분은, 1년 전 미국 국회의사당 벽을 기어오르는 폭도들의 영상을 찾아보시기 바란다. 민주주의의 본산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 한국에서 재연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유령은 억울함을 풀면 구천(九泉)으로 사라지지만, 좀비는 기하급수적으로 전파된다. 그 전파력은 오미크론을 능가하고 치명률은 100%다. 대한민국 젊은이들이 ‘스몸비’(스마트폰+좀비)와 ‘영끌족’(영혼까지 끌어모아 대출받은 족속)으로 전락하고, 대선은 아사리판으로 바뀌었다. 대한민국 성도들도 무저갱 같은 욕망만 남은, 살았으나 죽은 자들이 되었다. 다음은 내가 물릴 차례인가.

장동민(백석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