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진적 회계·경영진 방관이 낳은 ‘소도둑’… 결국 주주들만 피해 [스토리텔링경제]

입력 2022-02-21 04:03
최근 상장기업에서 횡령 사건이 잇달아 발생해 투자자들을 울리고 있다. 사진은 계양전기에서 6년간 회삿돈 245억원을 빼돌린 혐의로 구속된 직원 김모씨가 지난 18일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진행된 구속전 피의자심문을 마친 뒤 법원을 나서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회사 재무팀 직원 한 명이 수백억원을 빼돌려 주식에 암호화폐 투자까지….” 최근 잇따른 상장기업들의 횡령 사고를 놓고 증권업계에선 “영화 같은 일이 계속 터지고 있다”는 한탄이 나오고 있다. 투자금을 전부 날릴 위기에 처한 주주들은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신라젠에 이어 오스템임플란트, 계양전기 등에서 거액의 횡령 사고가 연이어 발생하면서 근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커지고 있다. 일부 기업이나 몇몇 직원의 직업윤리 문제로 덮기는 어려울 만큼 횡령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투자자 피해 방지를 위해 상장심사를 더욱 강화하고 내부 회계 관리 시스템을 은행과 연계하는 보완 방안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최고경영자의 투명 경영 의지를 높이는 방법이 가장 뚜렷한 해결책이라는 의견도 있다.

기업들의 후진적 자금 관리


최근 발생한 횡령 사건은 모두 후진적 자금 관리가 주된 원인이었다. 실제 금융 거래 명세서와 회사 내부 자금 입출금 내역에는 상당한 차이가 벌어지는 일이 반복됐는데도 이를 걸러내는 내부 시스템은 작동하지 못했다. 감시 시스템이 이처럼 허술하게 유지되다 보니 회사의 자금 관리 담당자들은 수년간 회삿돈을 빼돌려 쓸 수 있었다. 자동차 부품 등을 생산하는 계양전기 직원 김모씨는 2016년부터 6년간 회계장부를 조작하는 수법으로 회삿돈을 빼돌려 주식뿐 아니라 가상화폐 투자 등에 쓴 혐의로 붙잡혔다. 김씨가 횡령한 245억원은 계양전기 자기자본 1926억원의 12.7%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한국거래소 유가증권시장본부는 지난 17일 계양전기 주식 매매를 정지시켰다.

코스피 상장사인 계양전기 횡령 사건에 앞서 코스닥 상장사 오스템임플란트에선 재무팀장으로 있던 이모씨가 횡령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국내 1위 임플란트 제조업체인 오스템임플란트에서도 주먹구구식 회계 관리 탓에 횡령 범죄가 발생한 것이다. 이씨는 2020년 11월부터 지난해 10월까지 회삿돈 2215억원을 자신 명의 증권계좌로 15차례나 이체해 주식 투자 등에 쓴 혐의를 받는다. 한국거래소는 지난 17일 오스템임플란트가 상장적격성 실질심사 대상에 해당한다고 결정했다.

바이오기업 신라젠에선 모범을 보여야 할 경영진이 사고를 쳤다. 신라젠의 전현직 경영진의 횡령과 배임 혐의에 대한 수사가 2020년 5월 시작된 뒤로 신라젠 주식 거래는 현재까지 정지돼 있는 상태다. 신라젠 전현직 경영진은 페이퍼컴퍼니를 이용해 돈 한 푼 안 내고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인수하고 1918억원가량의 부당 이득을 취한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거래소는 지난 18일 코스닥시장위원회를 열고 상장폐지 결정이 내려졌던 신라젠에 대해 6개월간 경영 개선 기간을 주기로 했다.

‘경영자 의지’ 박약 문제

금융권에선 일부 직원이 작정하고 저지른 일탈을 현실적으로 완전히 막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범죄 유혹을 차단할 수 있는 자금관리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이 현실적 대안이라는 것이다. 은행과 회사의 자금 관리 시스템을 연결한 전산 관리 체계를 도입한 회사에선 돈을 몰래 빼돌린 뒤 거짓 회계 장부를 만들어 속이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다.

회계관리 제도를 보완하는 방법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현금 자산을 일정 규모 이상 보유하고 있고 매출 채권도 비교적 많은 회사인데 전산화된 자금관리 시스템을 갖추지 않은 회사에 한해선 좀 더 세부적인 회계관리 준칙을 적용하는 방식이다. 내부고발이 잘 이뤄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도 방법이다. 정부는 2017년 11월 회계부정신고 포상금 한도를 1억원에서 10억원으로 늘렸는데, 포상금을 회사 과징금에 비례해 늘리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징역 5년 이상인 횡령·배임죄 형량을 높여 범죄 유혹을 완전히 꺾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주주들의 막대한 피해를 초래하는 기업 범죄 형량 하한선을 높일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여러 대책이 나오고 있지만 기업 회계 감사를 강화하는 방법으로는 한계가 있다. 최고경영자가 강력한 의지를 갖고 감시하지 않는다면 횡령 범죄를 원천 차단하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게다가 경영진이 직접 연루돼 있거나 연루가 의심되는 횡령 범죄가 끊이지 않는 상황에선 경영진의 투명 경영 의지가 더 중요하다는 지적이 뒤따른다. 이상호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20일 “내부회계관리 제도나 감시 시스템을 잘 설계해 놓더라도 회계부정을 100% 적발하기는 어려운 현실적인 한계가 있다. 결국 최고경영진의 의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상장심사도 강화해야

코스닥뿐 아니라 코스피 상장사에서도 적지 않은 횡령 사건이 끊이지 않는 만큼 상장 심사를 한층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는다. 거래소의 상장 심사 평가항목 등을 더 늘리거나 기술력이나 미래 성장 가능성에 초점을 맞춘 기업의 상장 여부를 판단할 때 더 엄정한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코스피·코스닥 상장사의 횡령·배임 혐의 발생 또는 사실 확인 공시 현황을 보면, 최근 6년간 매년 평균 63.2건의 횡령·배임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의정 한국주식투자자연합회 대표는 “일반 주식 투자자들이 횡령 범죄 발생 가능성까지 파악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며 “수많은 개인 투자자들이 피눈물 흘리는 사태가 또 터지지 않도록 상장 심사 과정에서 더욱 철저한 점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경택 기자 ptyx@kmib.co.kr